입양아 한국어 교육 칼럼 <한국어, 잊혀진 35년의 행복을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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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 한국어 교육 칼럼 <한국어, 잊혀진 35년의 행복을 부르다>
-노선주, 디종한글학교장-
2015년 6월, 프랑스 입양인 단체인 ‘한국 뿌리협회’ 20주년 기념행사에서
170센티가 안 되는 작은 키, 까무잡잡한 피부, 다부진 몸매의 디디에는 바로 밑 두살 어린 동생과 35년 전 프랑스에 입양이되었다. 이제 겨우 학교에 들어간 일곱살박이 닐스와 바로 밑 동생, 그리고 부인 알렉상드라와 함께 디종한글학교에 처음 발을 딛던 날을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같은 한국 사람의 핏줄 때문이었을까 ? 늘 수줍어서 어디던 나서는 법이 없다던 닐스는 어린이반에 들어가자마자 또래 아이들과 떠들기 시작했다. 동생 트리스탕은 앵무새처럼 재잘재잘 내가 가르쳐준 말들을 어찌나 잘 따라하는지 « 안녕하세요, 저는 트리스탕입니다. »부터 시작해서 식구 중 가장 한국어 발음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쑥 내밀었다.
7년을 한국에서 보내고 동생 로랑과 함께 입양을 온 디디에는 주저하며 묻던 전화에서, « 형들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형이 둘 있었던 것 같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작은 아버님 댁에 살았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형들을 찾고 잘 있는지 소식을 좀 알고 싶어요. » 디디에와 로랑의 서류는 의외로 완벽했다. 홀트와 개인적인 경로를 통해서 쉽게 형들의 거처를 찾을 수 있었다. 형들과 소식이 닿았다는 소식을 듣고 디디에는 곧장 한국에 가 형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는 한국어 특훈을 부탁했다. « 형들이 내가 한국어 한 마디도 못하는 걸 보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한국은 잊어버리고 프랑스의 생활을 잘 꾸려가기 위해 많이 노력했어요. 그렇지만 형들에게 한국말로 기본적인 이야기는 해주고 싶어요. » 한국에 갈 때까지 남아있는 시간은 한 달. 한 달 동안 한글부터 시작해 기본적인 한국어 회화를 떼어주어야 하는 막대한 임무, 일이 바빠 일주일에 겨우 한 두 시간밖에 낼 수 없는 디디에와 알렉상드라가 이주동안 한국에서 형들을 만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쉽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
수업 시간 중에도 느꼈지만 디디에와 알렉상드라는 매우 수줍어 외국어 구사에 소극적이었다. 언어를 체득하는 양태가 어린이들과도 다르고 프랑스 성인학습자와도 아주 달랐다. 이후 입양아 학습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이런 성향을 10년 전에는 잘 이해할 수 없어 애를 먹었던 생각이 난다. 디디에에게 ‘가나다’ 한글을 가르쳐주는 것 부터가 걸림돌이 되었다.
보통 프랑스 성인 학습자의 경우, 짧게는 한 두시간 - 세종대왕께서 한나절이면 익힐 수 있다고 하신 말씀처럼- 길어도 일,이주일이면 익히는 한글을 몇 주가 지나도록 암기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글읽기가 걸림돌이 되었다. 닐스와 트리스탕이 이미 아야어여, 한글이 야호 노래를 신나게 큰소리로 따라부르면서 한글을 익힌 것과 달리 아빠인 디디에는 아직까지 한글의 가나다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디디에에게 프랑스 학생 중 하나가 이야기해주었던 « 가나다에 (캐나다에) 라마(동물이름)가 비비고 (ㅂ) 살아(ㅅ,ㅇ), ‘자’!, 차를 카! ‘타’고 파하로 가자 » 가나다 송도 한글이 야호 노래도 통하지 않다가 억지 춘향으로 보이던 캐나다 라마 노래에 디디에는 한글을 금세 익혔다.
우습게도 한 번 이렇게 한글을 익힌 디디에에게, 발음을 비롯해, 일상생활, 소개, 여행, 먹고 마시기, 외출, 등의 다양한 상황에 맞춘 기본 문형을 뽑아 카드를 만들었다. A4용지를 8개로 나눈 기본 문형 카드에는 100개의 문장이 적혀 있었고, 코팅을 해 언제 어디서나 가지고 다니면서 이용할 수 있도록 적어주었다. 발음을 위해 나는 한국어 발음을 써주고 녹음을 해주었다. 한국에 갔을 때 즈음에 코팅을 한 100개의 문장은 이미 손때가 묻어 있어 얼마나 디디에가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공부를 하는 내내 단어 카드를 손에서 떼지 않던 디디에 그리고 부인 알렉상드라와 함께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35년 전, 프랑스에 오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한국 땅이다. 만감이 교차하는 그 순간에, 나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후배의 제안으로 작은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었고 프로듀서와 작가와 함께 인천비행장에서 디디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렵사리 찾은 형의 가족까지...
형은 디디에와 너무나 닮아 어디 내놓더라도 금세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까무잡잡한 얼굴, 쭈빗쭈빗 고슴도치 같다고 늘 알렉상드라가 놀리던 머리, 다부진 작은 키. 나이는 어리지만 형수도 놀라는 눈치였다. « 어쩜,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이렇게 닮았을까요? »하며 남편과 동생 디디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피나는 특훈의 결과였는지, 디디에는 문형 카드 없이도 « 안녕하세요. 저는 디디에입니다. 한국 이름 행종이에요. 형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를 줄줄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주머니에 넣어 놓은 단어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동생의 이 말에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 미안해, 형이... 프랑스말을 한마디도 못해서. 이렇게 너는 고생하며 한국말을 배웠는데. 나는 한 마디도 못해서 미안해... » 어깨를 붙잡고 얼굴을 부비며 뜨거운 눈물이 디디에의 얼굴에 닿았다. 형이 하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한 채 두 어깨만 들썩이는 디디에는 나의 얼굴과 형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옆에서 프로듀서와 카메라맨, 그리고 후배 작가가 함께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봉고차를 타고 일행은 고향으로 향했다. 일곱살 당시 큰 아들 닐스의 나이에 프랑스에 온 디디에는 고향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도망가는 기억을 붙잡고 놔주지 않으려고 다짐했던 듯, 고향 마을 입구의 큰 성황당 나무, 정자, 그리고 작은 골목길과 과수원길,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묘지까지 가는 길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한가지 한가지 형에게 물을 때마다, « 죄송한데요 », « 미안합니다. » 를 어렵사리 떼면서 손짓과 발짓, 모든 것을 동원했다. « 나무... 나무 ?! 불...»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튀어나올 때마다 형은 가족이야기를 한 꼭지씩 들려주었고 그동안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디디에의 추억은 형의 이야기와 함께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디디에를 앞에 두고 큰 아버지는 «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너희를 다 거두지 못해, 이역만리 타역까지 너희들을 보냈다 »고 손을 꼭 잡으셨다. 디디에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얼른 주머니에 있는 단어카드를 빼서는 살짝 컨닝을 했다. « 괜찮아요. 저는 괜찮아요. 아이들 둘 있습니다. 부인이에요. 알렉상드라입니다. » 그렇게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숙부의 눈물이 그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지 계속 해 괜찮아요를 되되이며 디디에는 말을 이었다. « 저, 양부모님 프랑스 아버지, 어머니 다 좋습니다. 아이들입니다 »하며 닐스와 트리스탕의 사진을 보여주던 디디에는 꿇고 있던 무릎이 아픈지 다리를 꼼지락거렸지만 숙부의 손을 떼지 못한 채 계속 단어카드만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화근은 술이었다. 소주... 우연찮게 디디에가 방문하고 있는 동안 생일이 있었고, 미역국과 디디에가 가장 좋아하는 고등어 구이를 준비한 형수님은 잡채, 떡, 김치 한 상을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디디에를 맞았다. 한국에선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고 잔을 받는 즉시 비워 잔을 되돌려주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쳤던게 잘못이었나. 가만히 앉아서 형님과 형수님이 주는 잔을 무릎꿇고 얌전히 받던 디디에는 잔을 받을 때마다 « 술 잘 합니다. 감사합니다. » 란 말을 해서 모두를 웃겼다. 알렉상드라는 살고 있는 프랑스 디종의 부르고뉴 전통 노래를 부르면서 흥을 돋았다. 그리고 몇 병의 소주병을 비우고서야 모두들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디디에는 술병이 나 일어나지 못하고 취재 일정은 부산 자갈치 시장으로 잡혀 있었다. 형제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가 본 장소라고 했다. 시장에 가 배고플 때 어느 상인이 준 국물을 마시면서 형제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식사를 한 장소를 찾아가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디디에는 알렉상드라의 애칭인 « 알렉스, 알렉스... »만 부르면서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취재일정이 늦어지는 것보다 디디에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취재를 하던 카메라맨이 내 손을 끌었다. « 뭐라고 하시는거예요? »
디디에는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 알렉스. 사랑해. 네가 있어 프랑스에서 살 수 있어. 선주... 행복해를 한국말로 어떻게 해? » 100개의 문형 중에 써 있지 않던 말. « 행복해요 » 나는 « 행복해요 »를 나지막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랬더니 취한 와중에도 « 행복해요 »와 « 사랑해요 »를 수십 번 한국어로 되풀이했다. « 알렉스. 35년 전 일곱 살, 프랑스에 왔을 때 양아버지와 양어머니가 공항에 나와 기다리셨지. 바나나를 들고 계셨고 너무나 그게 먹고 싶었는데 먹을 수가 없었어. 무서웠어. 상스, 양부모님 댁까지 가는 동안 로랑은 그 바나나를 너무나 맛있게 먹었는데 난 무서워서 자동차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어. 지금까지 하루도 프랑스에서 행복한 적이 없었어. 너무나 힘들었고. 아이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밤이고 낮이고 일을 했어. 이런 나를 이해해주고 참아주어 너무 고마워. 사랑해. 네가 곁에 있어 정말 행복해. » 그리곤 한국말로 « 형님, 행복해요, 사랑해요 »를 개미소리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반복했다. 알렉상드라는 «14살에 만나 지금껏 처음 들어보는 사랑고백이에요. »하며 디디에를 한껏 껴안았다. 형님도, 형수님도, 카메라맨도, 나도.... 한국말과 프랑스어로 계속되는 중얼거림을 들으며 한없이 울었다.
다행히 카메라맨이 있어 이 모습을 테이프에 담았기 망정이지 디디에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시치미를 뚝 뗐다. 지금껏 살면서 처음으로 저렇게 수다를 떨었다는 디디에는 알렉상드라 앞에서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그러면서도 어디를 가든 형님의 손을 잡고 « 행복해요 »라는 말을 잊지 않고 했다.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 단지 100개의 문형을 가르치고 한국어를 잘 하게 하는 것 이상의 것이라는 것을 디디에를 통해 배웠다. « 안녕하세요 », « 안녕히 가세요 » 부터 시작해 « 우리는 내일 떠나요 »의 마지막 문형을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한국과 프랑스의 끊어진 많은 시간과 공간을 잊는 것이 아닐까. 현재 디디에는 디종한인회와 디종한글학교의 든든한 후원자로 매년 후원금을 각종 행사에 쾌척한다. 이제는 프랑스 현지학교 학생들을 위한 한국 여행에도 후원금을 지원해 프랑스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일이라면 앞장서 나선다. 지금은 한국 정자를 정원에 조성하여 지인들을 초대하는 꿈을 위해 열심히 한국정원책을 뒤적이고 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입양아를 보면...
더해서 한국을 받아 들이지 않는 입양아를 보면.. .늘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 나도 그랬어... »
« 한글학교를 만나기 전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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