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한인 분류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한묵 화백 파리에서 별세 (2016년)

작성자 정보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ebb808f0727a6543351f100d3ef3ffce_1673629847_5357.jpg
고 한 묵 화백 빈소에서 


11 1() (2016년) 10 30분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1-4대 한인 회장을 역임한, 프랑스 한인 사회의 최고령이신 한묵 화백(본명 한백유)이 파리 12구에 있는 생안투완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프랑스 한인회(회장 이상무)가 전했다. 향년 102. 한묵 화백은 3주전부터 폐렴으로 입원을 해있다가 11 1일 숨을 거두었다.

이에 프랑스 한인회는 유족과 상의를 거쳐 프랑스 한인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것으로 협의하여, 장의원들을 구성하고, 소나무 작가 협회와 재불 한인청년작가 협회의 임원및 회원들이 나서서 장례 절차를 밟는데 함께 해주었다.

프랑스 한인회는 11 2일부터 4(14-19)까지 한인회관에 빈소를 마련하여 조문을 받았고, 114일 금요일 11 30분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영결식을 갖고, 같은 날 18시 프랑스 한인회관에서 추모식을 가졌다.

1914년생인 한묵 화백의 삶에는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서울 출생인 그는 20대를 만주에서 보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다녔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과 가깝게 지냈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그는 종군화가로 한국 전쟁을 스케치 했으며, 이후 서울에 터전을 잡았다. 유영국 박고석 황염수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 초창기에 큰 업적을 남긴 미술 동인인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하고, 조형요소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이를 우리 식으로 체화해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새 전기를 연 것이다.

1961년 안정된 미대 교수직을 버리고, 파리로 건너왔다. 교수직에 안주했다간 그림다운 그림을 못그릴듯해 내린 결단이었다.

모더니즘과 추상 미술의 선구자다운 선택이었다. 거의 맨주먹으로 고국을 떠나오는 바람에 생계를 위해 거리 청소부며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을 그렸다. 대작을 그리고 싶어도 집이 너무 좁아 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곳저곳을 전전하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영감을 얻으면 몇달, 몇년을 한 테마에 매달리며 작업을 풀어가곤 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한국 화단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평생을 회화속 공간, 특히 1970년 이후부터 공간의 다이나미즘 시기에 4차원의 우주공간에 남아 젊은 마음으로 살아온 한 화백은 '한국 기하추상의 대부'로 불린다.

지난해 10월에는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파리에서 작업한 1세대 한국 작가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기 위해  프랑스의 대표적 아트센터인 디종의 ‘르 콩소르시움’에서 이응노와 한묵 전시가 있었다. 한국 미술과의 만남,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트랜스 모더니즘’의 특성에 주목한 전시로써, 한국 현대 미술의 1세대 작가로서 자신들의 삶은 물론, 작품 활동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조국을 떠나, 당시 모던 아트의 중심지이자, 예술가들에게 꿈의 도시였던 파리에 예술을 위한 망명을 하게 되고, 그 모더니스트들의 아우라는 이후 오랫동안 한국 작가들을 통해 퍼져 나가게 되었다.

2011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상, 2013 12회 한불문화상을 받았으며,  2015 11월 프랑스 문화부 장관 훈장을 받았다. 당시 훈장 수여식은 프랑스 한인회 주관으로 파리 세르뉘치 박물관에서 있었다.

11 2일에 프랑스 한인회관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고인의 생전 사진들이 회관의 한쪽 벽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었고, 그옆에는 한묵 화백과 관련된 인터뷰들이 TV화면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영정 사진속 한묵 화백은 색깔 고운 파란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앞에는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노란 장미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조문 온 이들은 사진과 영상을 보며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했다. 114일까지 조문객들을 발길은 계속 이어졌고, 11 4일 영결식이 있었던 날은 하늘도 슬픈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한묵 화백을 기억하며

11 4일 금요일 영결식이 끝나고 난뒤 18시 한인회관에서 추모식이 있었다. 비록 백수를 넘기며 사시다가 간 한묵 화백이지만 그를 더이상 볼수 없다는건 슬픈 일이다. 슬퍼서 간간히 눈물 짓는 이가 있었지만, 추모식에는 그를 기억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치루어졌다.

장의 위원장이었던 이상무 프랑스 한인회장은 빈소를 지켜준 청솔회 회원들과 소나무 협회와 청년작가협회 회원들, 그리고 파리 한글학교, 교회협의회, 여성회, 대사관, 문화원, OECD등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장례 절차를 위해 수고한 한금희씨에게 깊은 감사함을 전했다. 이 자리는 선생님을 생각하고 떠나보내는 자리라고 하면서, 작년 삼일절 기념식에서 만세를 할때 눈시울을 적셨던 한묵 선생님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모철민 대사는 안타깝고, 애통한 마음은 모두 같겠지만, 한묵 선생님이 초대 한인회장으로서, 한글학교 초대 이사장으로서 한인사회의 터를 만드신 분이라고 하면서, 그덕분에 한인 사회가 커졌다고 했다. 장례 위원장이었던 이상무 한인회장과 장례 위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일제 식민지 정신으로부터 우리의 독자적인 미술 회복에 처음으로 나선 한묵 화백

이배 화백은 한묵 화백의 작품 활동과 여러가지 작품 세계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가장 감명을 받은 것은, 우리나라가 해방후에 친일파에 의해 교육되어지고 있을1957년에 한국 모던아트 협회를 창설해서 일본의 식민지 정신으로부터 우리 미술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처음으로 나서신 분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분들이 권위를 차지하고 있을때 한묵 화백은 그런 것들을 뿌리치고, 1961, 당시 세계 미술의 중심이었던 파리에 왔다는 것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후학들이  우리나라의 전위 미술이라던가, 새로운 미술 운동을 일으키면서  오늘날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의 기초가  되신 분이 한묵 화백이라고 주장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미술계에 중심을 잡고 계셨던 분이셨는데 그 중심이 비어서 두려움이 앞선다고 하면서, 남아있는 우리가 잘 해나갈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 묵 화백의 부인, 이충석 여사는 후손이 없는데, 한인들이 자기 아버지 돌아가신것처럼  이번 장례를 위해 수고해주어 감사하다고 하면서 여한이 없고 선생님은 너무 행복하신 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남들이 고생했다고 하는데 한번도 그런 것 느껴본적이 없고, ‘선생님과 함께 해서 너무 행복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작품 하나 할때 마다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막연하게 팔릴지 알수 없는 것을 그렇게 하냐고 물으면, ‘화가는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가 아니다. 그리고 작가가 자기가 여기까지 왔다는 희열이 있다. 그게 보상이다.’라고 했다고 기억했다.

                                                                                                                                               

<파리광장편집부>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