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간 밖의 시간을 찾아서 – 한명옥 작가와의 인터뷰( 1)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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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브롤리 화랑 비트린 전»
-최옥경 / 프랑스 보르도 몽테뉴 대학 부교수-
okyang-chae@u-bordeaux-montaigne.fr
Sans titre 1995, fil de coton, pot en terre cuite H 30cm Diamètre 65cm
‘무서운 속도로 멀어져 가는 저 여자’라는 표현을 어느 소설에선가 읽고 가슴에 담아 둔 적이 있다. 언젠가 한명옥 작가에 대해 말할 기회가 생기면 그와 같은 톤으로 이렇게 소개하리라 생각했었다 : 저기 그 여자 전체가 있다. 자신의 모든 존재감을 안고. 그의 작업도 그러하다. 보잘 것 없는 항아리에 실이 끝없이 놓였는가 ? 낱낱의 쌀알이 쌓고 쌓여 만리장성이 되었는가 ? 무한한 색원들이 벽 전체에 별들처럼 영롱한가 ? 거기엔 한명옥 전체가 담겨 있다. 바로 그것이 저 가녀린 작품 사이의 빈 공간을 어떤 보이지 않은 에너지로 가득 채우는 것일게다. 팔레 드 도쿄 디렉터였던 올리비에 케플랭Olivier Kaeppelin은 처음부터 시간이 공간을 구축하는 (littéralement, le temps bâtit l'espace) 한명옥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필립 피게Philippe Piguet는 본질을 향해 치닫는 한명옥의 작품에서 그 건강함을 (salubrité mentale), 그리고 저명한 비평가, 까트린느 프랑블린Catherine Francblin은 놀라운 투명함의 시각적, 시적 지름길을 (un raccourci visuel et poétique d’une remarquable limpidité) 보았다. 타협하지 못하는 외골수의 작가적 기질이 한명옥을 은둔의 길로 몰아넣곤 하지만, 필자는 그가 큰 작가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유명한 비평가들이 찬사를 보내서도 그가 한 때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큐레이터들과 전시를 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건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정직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현재 파리 장 브롤리 갤러리 (Galerie Jean Brolly 16, rue de Montmorency 75003 Paris)의 비트린에서(7월 30일까지), 마르세이유 아르카드(Art-cade, Galerie des grands bains douches de la plaine 35 bis rue de la Bibliothèque 13001 Marseille)에서 (6월 18일까지) 한명옥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최근 한인회에서 기획한 수차례의 기메미술관 한국관 컨퍼런스를 통해 여러분들을 직접 만날 기회를 여러번 가졌다. 그렇게 가지게 된 신뢰가 오랫동안 숨겨진 보물처럼 지켜봐 왔던 한명옥 작가와의 대화를 같이 나누려고 결심한 동기이다. 두 주에 걸친 인터뷰 게재를 흔쾌히 승락하신 박언영 편집장님께 감사드린다.
최옥경: 86년 도불 후 디종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시고 파리로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한명옥: 한국에선 회화를 전공했었지만, 작가라는 소명의식도 없이 방황을 많이 하다가 86년 2월 프랑스에 와서 디종미술학교에 편입을 했지요. 그곳에 가서야 내가 어떤 기질의 사람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으니, 그 학교는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산실 같은 곳이예요. 한국미술교육이 테크닉 위주라면 이곳 그당시 미술교육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의식을 키우는 것이 최대 목표 같아 보였어요.
91년 파리에 도착해서는 또다른 문제와 직면했어요. 디종에서는 내 작업방향 설정에 온통 몰두하느라 정작 어떻게 젊은 작가가 미술계에 데뷔하는지 하나도 정보를 갖고있지 않았었고, 생활비도 넉넉치 못해 파리에 작업실 구하는 것도 어려웠고... 학교시절보다 더 큰 현실적 문제였지요. 그러다 어떻게 어떻게해서 저렴한 월세로 파리변두리에 작업실이 생겼고, 같은 처지의 젊은 작가들과 최대한 많은 전시를 하려했고, 매 전시마다 내 작품은 새로운 누군가의 눈에 띄어, 그가 초대한 또 다른 전시를 하게 되었어요. 파리 변두리여서 제대로 알려진 전시는 아니었지만, 95년 에스파스 몽조아에서 한 «잃어버린 시간 Temps perdu»전이 제 첫번째 개인전이었어요.
최옥경 : 선생님께서 프랑스에서 많이 알려지시게 된 계기는1996년 거장과 신인을 함께 소개하던 그 유명한 잡지 «나인티»에 장 르각과 함께 실리면서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명옥: 몽후즈 살롱전에 출품했던 돌덩이 (pavé)가 미술잡지 '나인티'의 관심을 끌어 96년 20호에 31페이지에 걸쳐 작품 사진이 실리게 되었어요. 그후 그 잡지를 본 스위스 기 바르치(Guy Bartschi) 갤러리와 만나게 되었구요.이후부터 그 갤러리에서 정기적으로 작품 전시도 하고, 파리 FIAC을 비롯 유럽 아트페어 참가도 할 수 있었으니, 나인티가 내게 참 큰 기회를 주었어요. 그걸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요.
최옥경 : 현재 파리 장 브롤리 화랑 비트린에서 전시를 하고 계신데 작은 전시 공간이지만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잘 대변해 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한명옥: 우선 브롤리 화랑의 비트린 공간은 25제곱미터로 내겐 얼마든지 변화를 시도해볼 수있는 만만한 크기예요. 특히 이번엔 접목시리즈 두 점을 선별했는데, 이만한 공간 사이즈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주 본 벽에 수평 수직으로 접목을 놓았고, 시멘트 바닥에는 빨간실을 담은 구리 재질의 다라를 놓았어요. 그리고 비트린에서 보이는 정면 벽엔 지난 겨울에 했던 수채화 뎃생 다섯점을 놓아 서로서로의 기운이 상생되는 그런 공간을 기대했어요.
최옥경 : 대체로 작품 소재들이 실이나 나무 돌멩이, 철봉 등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인데 그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만약에 내가 페인팅만 하는 사람이라면 내 재료는 붓 또는 연필 펜 물감 종이 캔버스에 한정되어있겠지요. 그랬다면 참 편했을텐데요. 적어도 재료찾기 고생은 조금 덜 할테니까요. 작업테마가 '나' 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관심반경에서 찾아지는 것처럼, 그것에 필요한 재료 역시 내 몸이 움직이는 행동반경에서 찾아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을까요? 특별난 이유없이도.. 내 작업은 지극히 일상적이니까요.
최옥경 :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띤 것은 ‘결합’이라는 테마였습니다. 가녀린 듯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 위태하게 서 있는 긴 나무, 그리고 그 언저리에 새 둥지처럼 얹힌 작은 돌멩이. 그 여린 존재들이 함께 흰 무명실로 한 없이 감기어진 장면은 알 수 없는 감동을 자아냈어요. 반대로 그 건너편 벽에 있는 철봉과 나뭇가지는 여리다는 느낌보다는 일 미터 이상의 전체 길이를 챙챙 감고 있는 실의 텐션으로 무한한 에너지의 발산을 느꼈습니다.
한명옥: 접목시리즈는 30년전 프랑스에 도착해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회환경에 적응하고자 애썼던 흔적이 담긴 작업입니다. 나무와 돌멩이, 나무가지와 메탈, 서로 이질적인 재료를 가느다란 무명실로 총총 감아, 하나는 벽에 수직으로 약간 비스듬히 세웠고 (Greffe1) , 나머진 수평으로 벽에 고정시켰습니다 (Greffe 3). 이질적인 상대지만 서로서로 잘 사귀어서, 또 서로 잘 적응해서 새로운 싹을 내리라 기대하면서 '접목'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특히 첫번째 접목은 1991년 제작한 뒤 줄곧 제 작업실 구석에서 소외되어 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 구경을 나왔어요. 두번째 접목은 오래전에 스위스 기 바르치 갤러리를 통해 팔렸는데, 어느날 불현듯 이것을 다시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져서, 2015년에 다시 만들게 되었고(Greffe3), 그것을 이번 전시에 보입니다. 물론 두번째 것과 조금 다르지만요. 이따금 흔적없이 사라진 작품들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최옥경 : 서로 성격이 많이 다른 소재를 결합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흔히 보는 아주 «가난한 poor» 소재를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선생님의 작품은 60년대 이태리 미술 운동 아르테 포베라를 생각하게도 하는데요… 실제로 선생님의 작품은 실처럼 부드럽고 밝은 소재와 돌이나 철봉처럼 단단하고 어두운 소재 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으니까요.
한명옥: 미술사의 많은 것에 난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르테 포베라 뿐 아니라, 내가 프랑스에 도착했던 86년이후 성행하던 프랑스 설치미술과 영국 조각, 독일 죠셉 보이스 등등 그리고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서 시작된 미니말리즘과 일본의 구타이, 모노하까지 수많은 미술 거장들이 내게 페인팅이 아닌 또다른 미술을 보여줬습니다. 한국에 있을 적엔 페인팅밖에 몰랐던 내게 또다른 미술이란 '공간'이었고, 난 그들이 시도한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표현의 방법이 다양함을 배웠고, 넘치는 자유속에서 나의 것을 찾기위한 고민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최옥경 : 접목 작품에도 쓰셨지만 선생님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하얀 면실입니다. 이번 장 브롤리 화랑 전시의 구리빛 다라에는 빨간 색 실을 쓰셨지만요. 제가 선생님의 작품을 실제로 본 것도 2005년인가 FIAC에서 바닥에 놓인 실에 감긴 돌 작품을 봤을 때였어요. 작품에 끌려 앉아 이름을 봤더니 한국 사람 작품인 것을 보고 놀랐었죠. 실을 쓰시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나요 ?
한명옥: 학교 습작 시절에 '나이'에 대한 테마를 다루게 되었어요. 작은 성냥곽에 탄생부터 각 나이를 오브제로 표현하는 좀 미숙한 작업이었는데, 탄생을 의미하는 오브제를 찾다가 자연스럽게 돌상에 얹어진 실타래가 기억났지요. 그때부터 실은 내 작업 속에서 시간을 상징하는 놀이감이 된 셈이지요.
최옥경 : 항아리에 실 놓는 작품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것인가요 ?
한명옥: 디종학교 졸업 후 파리로 이전해서 작업실 없이 작은 부엌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항아리에 처음으로 실을 놓기 시작했어요. 전기도 나오지 않는 깡촌에서 자랐던 어린시절, 큰어머니 집에 가면 컴컴한 방에서 삼을 삼고 계셨어요. 무릎에 침을 발라가며 문질러 대면 어느새 실은 길게 이어져서 옆의 광주리에 둥그렇게 쌓여졌지요. '큰어머니 일'을 내가 슬쩍 훔친거예요. 몇달 만에 항아리에 실이 꽉 채워졌을 때, 갑자기 디종미술학교 시절 화두가 기억나며 산삼 발견한 사람처럼 '심 봤다!' 를 외치고 싶었어요. 이 작업에선 형태와 의미가 공존할 수 있다고. 난 작업에서 형태를 위한 형태는 흥미가 없었고, 의미를 찾아내는데 참 많은 고심을 했거든요. 용기에 실놓기 작업은 완성된 하나의 형태로 물론 이해됩니다만, 실 한올 한올이 얹어지는 그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관객들은 항아리에 채워진 실의 표면을 보지만, 항아리 밑바닥부터 실을 놓기 시작한 나는 내면을 압니다. 마치 한 형태의 깊은 근원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찾고자했던 의미이고, 가운데 남겨둔 구멍은 관객을 그 깊이로 초대하는 통로입니다.
최옥경 : 이번에 전시된 무제 (2016)에서 빨간색 실이 다라의 둥근 윤곽을 따라 깊이와 넓이를 채우며 소복이 담겨있는 것을 보면 그 작품의 결과물보다도 장시간에 걸쳐 그 실을 놓는 행위를 하는 기나긴 과정을 보게 됩니다. 그 반복된 행위가 지난하지 않습니까 ?
한명옥: 실을 놓는 행위는 보기에 따라서 같은 제스춰로 보이겠지만, 결코 같은 것의 재탕이 아니랍니다. 실 한올 한올이 놓일 때마다 새로운 공간이 창출되니까요. 마치 오늘 내가 어제처럼 똑 같은 시각에 일어나서 똑같은 일과로 하루를 보냈다해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결코 같지 않은 것 처럼요.
최옥경 : 선생님의 데쌩은 나무 나이테의 오르가닉한 결을 연상시키도 하고 간혹 페노네의 작품들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데쌩 작품에서 보이는 이 물결같은 '결'에 대해 얘기해 주시겠어요 ?
한명옥: 올 겨울내내, 환쟁이들처럼 붓과 물감과 종이만 갖고 지냈어요. 색깔을 사용하다가 색의 현란함에서 좀 쉬고자 검정색을 찾았고, 그러다가 나온 것이 바로 이 뎃생입니다. 전에 오랫동안 종이에 볼펜과 펜으로 선긋기를 했었는데, 이젠 형태도 유연해지고 싶어요. 그래서 딱딱한 펜보다 붓을 사용하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듯 내 뎃생도 변화를 겪는 중이예요. 물결모양이든 나이테든 잘못 보신건 결코 아니예요. 그건 각자 상상에 맡겨요. 난 다만 소리없는 움직임, 그 어떤 하나의 텃치로 선모양이 움직여질 것 같은... 그런 조용한 움직임을 바랬어요. 형태와 의미 또 색깔로부터 자유롭자, 이게 2016년 한 명옥의 모토예요.
최옥경 : 결국 이 작품들을 통해 이번 파리 전시에서 어떤 공간을 만들어내고 싶으셨습니까 ?
한명옥: 어떤 분이 전시 본 소감을 황송하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
조용하고 아름답고, 뭉클했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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