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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한 민심, 서울서 대규모 촛불집회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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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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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국정 농단파문이 불거진 이후 첫 주말, 서울 도심에는 1만여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여 최순실 처벌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전까지는 의혹 정도로만 여겨졌던 최순실 씨의 국정 개입이 JTBC의 보도를 통해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박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10 29,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시민 촛불 집회에는 주최측이 신고했던 2천명보다 훨씬 많은 1만명 가량(주최측 추산 3만 명)의 시민이 참석했다. 주최측은 "유례없는 국정 농단이 자행됐음이 사실로 드러났다" '최순실 사태'의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다. 이 자리엔 이재명 성남시장과 더불어민주당 송영길·박주민 의원, 정의당 노회찬·이정미·김종대 의원 등 야권의 정치인들도 다수 참여했다. 시위대는 청와대 진입을 시도하며 한 때 경찰과 대치했으나 큰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파란의 시작

최순실 게이트의 도화선이 된 것은 10 24 JTBC 뉴스보도였다. 이 날 JTBC는 최순실 씨가 떠난 사무실의 짐 속에서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 PC를 발견했으며, 이 안에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 44개를 비롯해 국무회의 발언·대선 유세문 등 200여개의 파일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최순실 씨는 이 태블릿을 통해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길게는 4, 짧게는 몇 시간 전에 미리 받아봤으며, 직접 수정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여기에는 극비로 취급됐던 드레스덴 연설문까지 포함되어있어 충격을 더했다.  

       구체적인 증거가 나오고 여론이 거세지자 박 대통령은 1025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며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조언을 해준 것은 맞지만 청와대의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해명 내용 역시 거짓임이 JTBC 후속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군사, 외교, 안보를 넘나드는 주요 기밀사항들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이 최씨와 미리 상의한 내용이 드러난 것이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인연

최순실 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 최태민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최태민은 승려 출신으로 1970년대에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합친 사이비 종교인 영생교의 교주로 활동했다. 그는 여섯 명의 부인에게서 3 6녀를 두었는데 최순실은 5녀이다. 박 대통령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 뒤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위로의 편지를 전했고, 이것을 계기로 둘은 가까워졌다.

1975년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고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했고 박근혜는 이 단체의 명예총재로 추대되어 관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이듬해에는 박근혜와 새마음봉사단이라는 관변 운동단체를 만들어 함께 활동했다. 이때부터 최태민은 박근혜를 등에 업고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등의 비리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1979년 한양대에서 열린1회 새마음제전에서 최순실은 전국새마음대학생 총연합회장 자격으로 당시 새마음봉사단 총재였던 박근혜를 수행했다. 이것은 최순실과 박근혜의 첫 공식 대면으로 추정되며, 이를 통해 둘 사이의 관계가 최소 37년 이상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95년 최순실 씨는 정윤회와 재혼했다. 이 무렵 정윤회는육영재단 이사장 박근혜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다가 1998년 박근혜가 정식으로 국회의원이 되자 그의 비서실장으로 2005년까지 일했다. 이렇게 최태민 일가는 계속해서 박근혜 대통령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이다.

 

최근까지 계속 불거졌던 의혹

박근혜 정권은 출범 후 여러 번 인사 문제로 진통을 겪어왔다. 집권 여당이나 청와대 내부에서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인사가 계속되자, 점차 비선 실세에 관한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2014, 아무런 공식 직함이 없는 정윤회 씨가 청와대 내·외부 인사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하면서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내용의 청와대 문건이 언론에 유출됐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제기된 모든 의혹을 부정하고 문건유출은 국기문란 행위라며 오히려 유출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해당 사건 수사과정에서 박관천 경정은 "대한민국 권력 서열 순위는 최순실 1, 2위 정윤회,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박 경장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에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2014 12월에는 박 대통령이 정윤회씨 딸인 정유라와 연관된 승마 협회 조사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국·과장을 '나쁜 사람'으로 찍어 직접 교체 지시를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박 대통령은 모든 의혹에 대해 일절 부인했다.

       2016 7, TV조선은 "미르재단이 설립 두 달 만에 대기업에서 5백억원에 가까운 돈을 모았는데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이 모금 과정에 개입한 정황이 있다"는 보도를 냈다. 두 달 뒤에는 "미르와 K스포츠재단의 실세가 최순실이라는 한겨레의 보도가 있었다. 박 대통령은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보도 내용을 유언비어로 일축했다.

폭로는 계속됐다. 얼마 후, 경향신문에 의해 삼성이 정유라 씨를 위해 독일에 승마장을 구입했음이 드러났다. 이어서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입학과 학사 과정의 특혜 사실도 밝혀졌다.  또한 최순실 씨가 독일 현지에 비덱이란 법인을 만들고, 80억원을 추가로 국내 기업에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던 즈음, 10 24일 박 대통령은 돌연 개헌 추진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JTBC에 의해 최순실 씨의 태블릿PC 내용이 폭로된 것이다. 25일 긴급 기자회견을 연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오늘로써 대통령발 개헌 논의는 종료되었음을 선언한다. 정치권은 성난 민심을 수습하는데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이 나라는, 이 국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국민의 것"이라며 대통령의 개헌 시도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석연치 않은 최순실의 귀국다음은?

박 대통령의 사과 다음날 세계일보와의 독점 인터뷰에서 최순실 씨는 연설문 유출 건은 인정했지만 다른 의혹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부인하며 “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신경쇠약에 걸려 있고 심장이 굉장히 안 좋아 돌아갈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흘 만인 30, 최씨는 영국을 거쳐 돌연 귀국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최순실 씨 귀국 당시 인천공항에는 검찰 수사관 10-20명이 나와 있었으며, 그 중 대여섯 명이 최씨와 함께 공항을 나섰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검찰은 피의자나 참고인을 미리 접촉하지 않는다. 이런 보도가 사실이라면 공식적인 조사 이전에 검찰과 최씨가 사건에 대한 의견 사전 조율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귀국한 최순실 씨는 이경재 변호사를 통해서 검찰소환에 응하겠으나 건강이 좋지 않고 장시간 여행·시차 등으로 매우 지쳐 있으므로 하루 정도 몸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했고 이에 대해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31일 오후 3시에 최씨에게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도록 통보했다. 이에 대해 박지원, 노회찬 등 야권 정치인들은 물론 새누리당조차 왜 검찰이 최순실 씨를 공항에서 긴급체포 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한편 1028,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10명 전원에게 사표 제출을 지시했다. 청와대는 이틀 동안이나 완강히 거부하던 검찰 압수수색에도 협조하여 임의제출 방식으로 상자 일곱 개 분량의 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의 주요 인물인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비서관과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등의 사무실에는 진입을 불허하여, 결국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게 아니냐는 질타를 받고 있다.

10 26,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 또는 탄핵'으로 이번 사태에 책임져야 한다는 여론이 42.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 60대 이상을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하야 또는 탄핵' 답변이 1순위를 차지했다. 같은 날 박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17.5%로 하락해 재임기간 최초로 20%대 지지율이 무너졌다.

 

<파리광장 / 김연수 (rachelle.kim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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