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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프랑스 렌느까지, 어떤 시리아 난민의 힘겨운 여정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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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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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부터 20010년까지 프랑스 렌느 Rennes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시리아로 돌아가  대학교수로 있다가 시리아에서 살지 못해 난민으로 다시 프랑스로 온 압둘라만의 이야기를 프랑스 티비엥포가 싣었다. 기사는 난민을 받아들이는 프랑스 제도적인 미흡함을 비판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이에 번역하여 올린다.

압둘라만abdulrahman은 그의 가족과 함께 지옥 같은 시리아를 떠났다. 시리아, 다마스커스 거리 군데군데 불안감이 감돌았다. 군인들은 미니버스에 올라 승객들의 신분증을 검열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압둘라만은 긴장했다. 압둘라만은 성공적인 학업 평가로 병역의무를 피할수 있었는데, 십여명의 젊은이들을 그자리에서 군대로 보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검열은 하루에 6차례 혹은 10차례까지 있었으며 어떤때는 한사람에게30분이 걸리기도 했다.

그는 다마스커스 대학 교수였다. 그의 집에서 대학교까지 가는 시간은 보통 15분 정도 소요되는데 어떨때는 검문으로 인해 3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 넌 테러리스트를 옹호하지 ‘’

2011년 압둘라만이 살았던 작은 도시, 센나야 Sehnaya 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와 세자녀는 알-아사드 군대와 저항군 사이의  충돌로 일어나는 포효를 들어야만 했다. 또한 자주 접전 지역을 피해가야만 했다.

비밀요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금품과 전자 제품을 빼앗고, 아내를 성폭행하며 남자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퍼졌다.

대학에서 범죄및 희생 심리학을 강의하던 압둘라만은1974년생으로, 2011년 봄 학생들앞에서 표현의 자유를 찬미한다는 이유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다마스커스 대학의 바아스당 하수인들은 그를 불러 비난했다 : ‘’너는 나라의 연대를 파괴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옹호하지’’ 압둘라만이 금지된 쿠르드 당원이라는게 그들은 못마땅했다. 비밀요원들은 그가 어떻게 대학교수 자리를 얻었는지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사실 바샤 알-아사드가 통치하던 시리아에서는 약간의 돈과 삼촌이 바아스 당원이면 자리 얻기에는 충분했다. 2012 7 18일 다마스커스 중심에 있던 국가 안전국이 테러 공격을 당했을때, 그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시리아를 떠날 결심을 했다.  그로부터 15일 동안 그는 스트레스로 인해 10킬로가 빠졌다.


사회보조금으로 살수가 없어

그리고 2016 3월 프랑스 렌느, 슈퍼 계산대의 금고가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살람 Salam" ‘’봉쥬르Bonjour"로 시리아인, 알제리인, 모로코인, 콩코인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압둘라만은 지금 프랑스 지방 도시, 렌느 중심가에 있는 소규모 유통업체인 슈페라시아Superasya계산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다마스커스를 떠난지 3년 반이 되었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손님들은 친숙했다. 하지만 밤에는 술, 마약으로 폭력성이 짙어진다. ‘’이 일이 나를 살렸어요’’라고 압둘라만은 이야기한다. 이것으로 인해 가족들을 오게 했고,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회 보조금으로 살지 않기에 자녀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보일수 있다고 한다. 가족 모두 무탈하다 : 아내와 12, 9살의 두 아들, 그리고 6살 딸이 있다. 부르타뉴까지의 여정은 무척 길었고,  힘들었다.

압둘라만은 여러차례에 걸쳐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있었다. 아내와 자녀들이 2012 7월에 먼저 시리아를 떠나서 이라크 국경에서 20여킬로 떨어진 코르타반에 도착했다. 그곳은 고향이기도 했다. 압둘라만은 검열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동생의 신분증을 가지고 다녔다. 한달뒤 그는 가족과 만난다.


컴퓨터와 디플롬만 챙겨서 떠나

그들은 이라크의 쿠르드인을 찾고자 했다. 압둘라만은 컴퓨터와 디플롬이 든 등가방만 가지고 밤에 다시 혼자 떠난다. 이라크와 쿠르드 정부의 접전 지역에 있는 도미즈 난민 수용소에서 몇주 지낸다.   그가 작호Zakho 대학에서 임시직을 얻었을때 가족과 다시 만나서 정착하게 된다. 압둘라만은 정착하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시리아의 쿠르드인인 압둘라만은 이라크의 쿠르드인들에게 환대 받지 못했다. 그가 아내와 산책을 할때면 놀이공원의 동물이 된듯했다. 왜냐하면 이라크 쿠르드인은 여성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스웨덴 대학와 교류 프로그램이 있었다. 참가자 명단에 있던 압둘라만의 이름이 삭제 되었고, 이라크 쿠르드인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도저히 자신의 집에 있다는 생각을 가질수 없었다. 게다가 급여는 불규칙했고, 연구 프로그램을 시작하려면 쿠르드 비밀국의 동의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유학했던 프랑스, 렌느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한것이다.

그는 2003 9월부터 2010 6월까지 렌느Rennes에 있었고, 그의 두 자녀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2001년에서2003년까지 대학 조교수로 있다가 시리아 정부 장학금으로 렌느 2대학에 유학을 했고, 심리병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라크를 결정적으로 떠나올수 있게 한것을 당시 그가 만들어놓은 연결망이었다. 압둘라만은 먼저 유럽으로 비밀리에 들어오기 위해 밀수업자들과 접촉을 했지만 바로 포기했다. 너무 비싸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렌느 대학의 심리학 부서와 도박을 시도한다.


심리학 박사와 작은 슈퍼마켓 계산대 직원

2014년 대학은 그에게 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자격으로 3개월짜리 개인비자를 준다. 프랑스에 와서 시리아인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반인종차별과 인민들간의 우정을 위한 협회의 행동가 집에 거처하게 되면서 망명 신청을 했다.  받아들여지자 마자 바로 가족들을 오게 했다. 당시 가족들은 이슬람 국가가 공격을 시작했던 쿠르드에 갇혀있다시피 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대시Daech에서 15킬로 떨어진곳에 있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수개월 동안 대기한 뒤 2015 3 18일에 프랑스로 왔다.  

가족들은 잘 정착했고, 압둘라만은 그가 살고 있는  난민에게 주는 저렴한 가격의 아파트를 기자에게 공개했다. 가스레인지, 식탁, 전자레인지 등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가 주었다고 한다압둘라만 부부는 불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자녀들은 바로 학교에 들어갔다.

그렇게 마치 동화처럼 그들은 프랑스 사회에 들어갔다. 압둘라만이 박사학위자인데, 작은 슈퍼마켓의 계산대 직원으로 일하고 있고, 그의 아내는 회계사인데 어떤 회사도 그녀는 채용하지 않고 단지 참관 인턴만 허용하고 있다는것을 제외하고는

그가 가진 자격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데 연신 실패했다.  형무 행정소는 그가 너무 대학적이라는 이유로 비급진화 아뜰리에 일을 맡기기를 원하지 않았고, 대학은 소논문이 많이 없고, 좋은 과학 잡지에 속하지 않았다며 강사나 임시 연구원 자리도 주지 않았다.

그는 컴퓨터 해킹도 할수 있을 정도로 잘 다루었는데, 그쪽으로 자리를 알아보지 않았고, 보통 고용센터인 Pôle Emploi쪽으로 많은 문의를 했고, 아무도 간부나 디플롬있는 이들을 위한 고용센터APEC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고 기자는 이야기한다.


난민을 수용하려면 선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압둘라만이 프랑스 행정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적은 한두번이 아니다.  2014 10 31일 난민증을 얻었을때, 이라크 쿠르드의 수도 에르빌 프랑스 영사관에서 다른 가족들의 여권을 요구했었다. 문제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막내 여권이 만료된 것이다. 프랑스 출생 신고서를 보내도 통과되지 않았다. 막내만 남기고 모든 가족들은 떠나라는 제안을 받았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는가 ? 이 문제는 협회에서 국회의원에게 알려서 해결할수 있었다.  

이런 일들에 압둘라만은 진력이 나기는 했지만, 의기소침해하지 않았다. 렌느의 문화교류협회 관계자는 고학력일 경우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난민들에게 소소한 일거리는 있다. 하지만 압둘라만 같이 디플롬이 있는 경우는 다른 이야기라고 했다.

문화교류협회에는 100여명의 시리아인들의 서류가 있다. 대부분 고졸들이다. 그들의 전공과 맞지 않은 직업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기자는 이야기한다. 협회에서는 응시자들이 회사 면접에서 이력서와 동기부여 편지를 뛰어넘어 스스로를 잘 방어할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한다.

이에 압둘라만은 ‘’난민을 수용하려면 선한 마음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통합 계획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다른 문화에서 왔다. 나는 예전에 6년 반을 이곳에서 살았지만, 다른 이들은 처음왔다. 내가 10년전에 처음 왔던 것 처럼 ‘’ 이라고 했다.

슈퍼마켓에서 일하면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현금인출기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고, 대통령을 욕할수 있고, 두려움이나, 강압 없이 자유롭게 투표할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고국에 대한 향수는 항상 있어

매일 15 30분 압둘라만은 일터로 향한다. 일터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게 위험스러울때도 있다. 시리아 알콜 중독자 무리들이 와서 그에게 바카르 알-아사드 를 지지하냐고 묻는다고 한다.

사탕, , 갈은 밀, 냉동 도미 등이 있는 작은 슈퍼마켓에서는 그는 영어, 아랍어, 불어를 구사하며  물건을 사러온 손님들과 소통하고 있다. 이것이 압둘라만의 일상이다.

‘’나는 좋은 일거리가 있고, 좋은 아파트가 있으며, 아이들이 삼개국어의 학교를 다니고 있다. 솔직히 시리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시리아는 살곳이 못된다. 그곳에서 살아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 그리고 미래는 ? ‘’우리는 고국에 대한 향수가 있다. 나는 결코 고향에 다시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늙어있을 것이다….’’

                                                                                                                                                     

<파리광장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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