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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38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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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rc Chagall - The Birthday (1915)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신화 중 하나는 플라톤의『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조상 *안드로진(Androgyne)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게 얼굴이 두 개 달린 둥근 몸과 네 개의 팔,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완전한 존재였던 이들은 끝내 신의 권위에 도전했고, 불안을 느낀 제우스가 그들을 반으로 잘라버렸다. 이후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잃어버린 반쪽을 그리워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딘가에 내 운명의 상대가 존재한다’는 오래된 언어적 실천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로 하여금 ‘단 하나의 사람’, ‘영혼의 단짝’, ‘나를 완성시켜 줄 존재’ 를 찾게 만든다. 다소 허황하고 엉뚱하기는 해도 우리를 완성시키면서도 결핍을 자각하게 만드는 사랑의 역설을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결혼 제도의 전례 없는 쇠퇴와, 개인주의의 부상 속에서 보다 자유롭고 현명해졌다고 믿는 우리들은 어째서인지 아직 완벽한 파트너에 대한 신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현대 사회의 모든 것이 사랑은 고생뿐이라고 말해주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설렘과 이끌림의 감정을 기다린다. 


바이(Bi), 팬(pan), 폴리(poly) 아니면 무성애(no sex)까지, 촌뜨기 사랑관을 가진 내가 파리에서 목격한 사랑의 형태는 놀라울 만큼 다양했다. 성생활의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더 자주 길을 잃는다. 남사친과 여사친에서 시작해 오픈 릴레이션쉽, 시추에이션십, 데이트, 크러시(crush), 섹스프렌드, 원나잇 파트너까지... 각자의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관계의 방식을 곱해보면 사랑의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더러는 사랑의 해체를, 더러는 사랑의 재구성을 말하지만 머리 둘, 팔 넷, 다리 넷을 가진 파리지앵은 내 눈에 완벽한 인간이라기엔 여전히 공허하다. 데이팅 어플의 추천 알고리즘으로 이 모든 사랑의 가능성을 손쉽게 실험할 수 있지만 중독과 금욕을 주기적으로 오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신적 피로가 뒤따랐다. 이토록 복잡해진 연애 궤적 위에서 프랑스인의 64%, 젊은 세대의 74%는 여전히 스스로를 ‘로맨틱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로맨틱(romantique)이란 사랑을 단순한 소비가 아닌 의미 있는 감정적 사건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만남이 상품화되고 관계가 알고리즘화 되어도 사랑은 살아남았다. 복잡해진 것은 관계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단지 사랑은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패턴도 규칙도 없으며 어떤 사랑도 모든 사람의 사랑을 대표할 수 없을 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권력과 자본, 계급과 성별 지배 구조 따위를 차갑게 분석하는 사회학자였다. 그런 그가『남성 지배』(1998) 에서 드물게 서정적인 방식으로 ‘순수한 사랑(amour pur)’을 설명한 것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부르디외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개인적 열정이 아니었다. 그는 순수한 사랑을 폭력도 지배도 소멸될 수 있는 마법 같은 섬(îlot enchanté)이라고 표현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지배 관계가 최소화된 상태에서만 가능한 대칭적이고 평등한 관계의 가능성이다. 남성 지배가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구조라고 설명하는 이 책의 다소 외딴섬 같은 결론이었다. 사회학자에게 사회적 평등이 순수한 사랑의 조건이 되듯 완전한 사랑은 끝내 예외적 경험이나 하나의 이상향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순수한 사랑은 냉정함과 효율을 요구하는 근대적 삶의 논리에 균열을 내는 마지막 저항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안락함과 나르시시즘적 만족에만 관심을 둔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조금 더 나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가 다시 사랑한다는 것은 이전 사랑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끊임없이 발명해 내는 일이다. 그런 사랑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안드로진(Androgyne) : 은 그리스어 단어에서 유래한, 남성을 의미하는 접두사 Andro-와 여성 을 의미하는 Gyne이 합쳐진 용어.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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