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35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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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금메달리스트 플뢰레 펜싱 선수이자 사진작가 엔조 르포
낯선 도시를 여행하기 전에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곳 출신 작가의 책을 한두 권 읽어보는 편이다. 책 속에서 무심히 언급된 지명과 인물들이 묘사된 문장 속에서 가이드북에는 없는 뜻밖의 단서를 발견하곤 한다. 같은 취지로 나는 프랑스로 첫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에게『삼총사』로 더 익숙한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소설『세 근위병(les trois mousquetaires)』을 권하곤 한다. 1844년, 파리의 한 일간지에서 연재를 시작한『삼총사』는 모험과 로맨스, 음모와 유머 같은 오 락적 요소가 풍부한 대중소설이었다. 연속극처럼 매일 한 조각씩 공개되는 이야기는 예술을 넘어, 한 사회가 자기 자신을 상상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머스킷 총을 든 엘리트 근위병 '삼총사'는 본래 품격과 명예를 가진 아토스, 힘과 유머를 가진 포르토스, 신앙과 사색을 품은 아라미스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방에서 이제 막 파리로 상경한, 충동적이면서 자유분방한 신출내기 달타냥이 주인공이 된 이유가 바로 거기 에 있다.
뒤마는 자신을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역사와 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하는 '폭로자'라 불렀다. 삼총사 또한 허구의 창조물이 아니라 고전 회고록과 사료 속에 살아있는 인물들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루이 13세와 왕비 안 도트리슈, '빌런' 으로 묘사된 프랑스 절대왕정의 토대를 세운 냉혹한 정치가 리슐리외 추기경, 루이 14세 시기 근위대 장교로 복무한 샤를 달타냥 모두 실존 인물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토막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마치 스크린 위에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문구를 보는 효과를 느꼈을 것이다. 삼총사가 다루는 시대와 그 소설이 실제로 쓰인 시대 사이에는 200년의 간극이 있었지만 소설이 묘사하는 파리 시내의 거리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1789년 혁명으로 왕은 쓰러졌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권력과 인간성 사이의 긴장은 소설 밖에서도 이어졌다.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명예, 자유, 우정과 같은 진부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프랑스적 가치만으로도 매력은 충분하다. 그러나 신분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삶을 개척하던 젊은 달타냥, 그리고 훗날 권력에 복속된 노년의 허무 속에서 우리는 19세기 파리의 시민계급이 꿈꾸었던 ‘근대적 개인’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출신도 성향도 제각각이던 달타냥과 삼총사가 마침내 서로에게 겨눈 칼끝을 거두고, 한데 모아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Tous pour un, un pour tous)”라고 외치는 장면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이 구호는 신분이나 처지, 그리고 자신들의 이상조차 뛰어넘어 서로를 지키겠다는 아주 개인적인 우정의 상징이었다.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다시 두세기가 지난 지금, 왕정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들의 구호는 프랑스 공화국의 새로운 가치인 연대와 평등의 언어가 되었다. 오늘날 국가 권력이 비대칭적으로 힘을 행사할 때 —예컨대 마크롱 정권이 의회의 반대에도 주요 개혁을 강행하거나 예산 삭감을 밀어붙일 때— 프랑스의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함께 서서 목소리를 높인다. 프랑스인은 개인주의의 극치이지만 위기 앞에서는 주저 없이 “하나는 모두를 위해”를 외치는 집단주의자가 된다. 이 구호가 가진 모순만큼 불의와 불가능에 맞서는 프랑스 정신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 있을까.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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