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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32 <두 바퀴로 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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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내내 각기 다른 매력을 품은 파리지만 여름의 맛은 특별하다. 특히 8월이 되면 프랑스 직장인의 단조로운 일상을 풍자하는 ‘Métro, boulot, dodo'(지하철-일-잠)의 반복이 반쯤 강제로 멈춰 선다. 주민들이 하나둘 바다로 떠나면 분주했던 도시의 빈틈 사이로 길게 참았던 숨비 소리가 여름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여름에 건기가 찾아오는 것 은 아무래도 프랑스가 축복받은 땅임을 보여 주는 하나의 증거다. 한낮 기온이 가장 높은 날에도 건물만큼 높이 자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에 서면 그곳이 곧 피서지가 된다. 평소라면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애프터워크 술자리를 갖는 것이 훌륭한 도시 활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 시내 교통량의 5%에 불과한 자동차와 스쿠터마저 모두 휴가지로 떠난 지금 한산해진 도심을 자전거로 마음껏 달려본다. 한때 도로를 가리지 않고 악명을 떨쳤던 전동 킥보드도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파리는 유럽 최초로 무료로 공유되는 전동 킥보드를 허용한 도시 중 하나였지만 2년 전 국민투표로 이 서비스를 퇴출시켰다. 차량에 대한 규제도 날이 갈수록 강화되는 지금 파리에서 보행자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은 자전거뿐이다. 바게트를 하나 꽂고 달리는 자전거 이미지는 여전히 프랑스를 상징한다. 바게트 때문이기도 하고, 자전거 때문이기도 하다. 


자전거가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프랑스 문화와 정체성을 드러내게 된 데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의 역할이 크다. 1903년 첫 대회 이후, 매년 여름이면 프랑스와 주변 국가를 잇는 도로가 자전거 경기장으로 변해왔다. 얼마 전 2025 투르 드 프랑스의 마지막 관문인 파리 도심 루프 구간에서 샹젤리제 결승 선을 향해 달리는 선수들을 우연히 목격했다. 출퇴근 도로가 하루아침에 자전거 트랙으로 바뀌었지만, 주민들은 불평은커녕 모두 길가에 나와 선수들을 한 목소리로 응원했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코앞을 스쳐가 는 선수들의 숨소리와 관중들이 던지는 응원 의 말이 뒤섞이며 온몸의 감각이 깨어났다. 어떠한 기계적 동력 없이 두 다리로만 우직하게 페달을 밟는 이 구식의 스포츠가, 전라남도 영암에서 직관한 한국 최초 포뮬러원 (F1) 대회보다 더 깊은 여운을 남겼다. F1 전용 머신의 속도는 막상 눈으로 쫓기 어려웠고, 엔진에서 나는 굉음과 폭발하는 배기 소리는 비싼 좌석일수록 고통스러웠다. 그들만의 리그에 우리의 응원은 닿을 리 없었다. 그 러나 사이클리스트들이 오르막길이라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적과 맞서는 모습을 보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마치 함께 달리는 듯한 몽환적인 감각이 밀려왔다. 그 이름처럼 프랑스 전역을 투어(tour)하는 이대회는, 경쟁이 아닌 행복한 여름을 상징하는 하나의 축제처럼 보였다. 


자전거는 내가 아는 한 계급이 없는 유일한 탈것이다. 누구나 자전거에 얽힌 추억 하나쯤은 있다. 집에 한 대뿐인 차를 아버지가 타고 나가고 형이 교육시설에 가면, 어머니는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바쁜 일상을 오갔다. 항상 차도나 인도를 달려야 했던 그 시절, 자전거나 자전거를 탄 여성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의 씩씩한 등 뒤에서 그녀가 개발한 수신호를 보고 배우며 처음으로 한 여성의 자유와 자립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그렇게 기다려왔던 보조바퀴가 달린 첫 자전거를 선물 받았을 때나, 보조바퀴를 떼고 두 바퀴로 처음 섰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생생하다. 여름 더위를 이기기 위해 목적 없이 떠난 모든 모험에서 얻은 것이라곤 손바닥과 무릎에 까진 상처뿐이었지만, 나는 수많은 발명가 중에서도 자전거의 형태를 완성한 이름 모를 프랑스의 한 귀족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한국을 떠나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르완다에 살 때에도, 가장 선진화된 나라 중 하나인 프랑스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직접 소유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 자전거 택시나 공유 자전거 서비스로 이 사랑스러운 두 바퀴 동반자는 내 곁을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었다. 파리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상의 풍경은 큰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에 아이 둘셋을 태우고 달리는 모습이다. 자전거를 '비시클레트(bicyclette)'이라고 부르든 '벨로(vélo)'라고 부르든 파리지앵에게 그것은 전부 애정이 담긴 호칭이다.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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