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31 <응급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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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는 예고하지 않는다. 사람 한 명 지나지 않는 고요한 길 위에서, 30년 무사고 자전거 운전 경력자에게도 제멋대로 찾아온다.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철제 쓰레기통에 전속력으로 부딪히고 공중제비를 도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건 주마등 같은 과거가 아니었다. 보류된 체류 자격증, 의료 보험의 유효 기간, 건강보험카드(carte vitale)를 지갑에 넣고 나왔는지, 혁명기념일에도 병원이 정상 운영 중일지, 주치의가 이맘때 휴가를 간다고 했던가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들에 먼저 사로잡힌다.
영원처럼 긴 검토가 끝나고 나서야 벤치에 처박힌 나는 치료가 번거로운 부위부터 차례로 훑는다. 머리나 얼굴이 문제라면 응급실을 가야 할 수도 있다. 혹시 여권에 붙은 사진과 내 모습이 달라 보이기라도 한다면 더욱 곤란하다. 치아는 긴급이 아니면 진료 예약도 오래 걸리고 비용도 상당하다. 보험 적용도 매우 제한적일 테고. 팔이나 다리의 경우 골절이나 염좌처럼 병원 방문 횟수가 늘어날 상황이라면 곤란하다.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에 고층에 살고 있다면 더더욱. 치료와 환급을 일찌감치 포기할 경미한 상처들, 찢어진 옷, 부서진 안경, 망가진 자전거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프랑스의 건강보험제도는 원칙적으로 '모두'를 보장한다. 이는 소수의 비영리 보험기금이 운영하며 재정은 주로 세금으로 충당한다. 자발적으로 민간 건강 보험(mutuelle)을 추가로 가입해 본인 부담금을 줄일 수도 있지만, 공공 보험 만으로도 전체 비용의 70-80%는 보장받을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의 모든 의료 시술과 의약품의 가격은 보건부에서 결정한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을 이용하며 자라온 나는 이러한 '보편적 단일 보험자 제도'가 저렴하고 공평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간혹 앰뷸런스를 타고 도착한 병원에서 두 바늘 꿰맨 것만으로 만 달러를 청구했다는 미국 의료 시스템의 악명 높은 풍문에 덩달아 프랑스에서도 응급실을 꺼리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응급실을 가야 할 정도로 아프다면 상황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접수비 약 20유로, 국소 마취를 포함한 작은 수술비는 100유로 안팎, 그리고 대부분 무료이거나 5유로 수준의 약 값만 지불하면 그만이다. 이처럼 보장 범위가 넓은 프랑스 의료 정책에도 의료 시설 간 경쟁 부재로 인한 첨단 기술 혁신의 정체 같은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병원은 기계들의 전시장이 아니라 인간 회복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말에 동의한다.
응급환자이긴 했지만 상처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긴 진료 시간을 가졌다. 담당 의사는 자신의 보수적인 처방이 나를 위한 것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설명했다. 상처 부위의 소독 방식, 건조 치료와 습윤 치료에 대한 견해, 특정 질병의 역사와 약의 효능까지 — 지난한 설명을 듣는 동안, 나는 왜 프랑스에서 진료 접근이 어렵고 대기 시간이 이토록 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지혈이 되지 않는 상처부위 때문에 귓가를 맴돌던 불길한 불협화음과 불안한 리듬의 왈츠곡은 잦아들었다. 질병이 때로 용기와 약을 무너뜨리는 이 조용하고 파괴적인 공간에서, 환자들 중 누구도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보험이며 서류며 진료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하지도 않았다. 보조 의료진이나 행정직원, 서비스 노동자들 모두 자신이 참여 중인 의료 노동 환경을 둘러싼 파업이나 시위와는 무관하게 친절하고 사려 깊었다.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 감염 징후가 없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오며 생각했다. 회복이란 어떤 질병을 고치는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방식에 있다는 것을...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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