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29 <살찌지 않는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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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도시로 잘 알려진 파리는 의외로 비만율이 10% 미만으로 서구 선진국 도시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오히려 깡마른 사람들의 비율이 체감상 여느 도시보다 높게 느껴진다. 자전거 바구니에 바게트 하나를 꽂은 채 달리는 파리의 풍경이 괜히 상징처 럼 여겨지는 게 아니다. 밀가루 같은 정제 탄수화물이 비만의 주범이자 다이어트의 주적으로 분류된 지 오래지만, 장시간 발효로 속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린 바게트 한 개가 얼마나 많은 살을 찌울 수 있겠는가. 바게트는 이곳에서 별미나 간식이 아닌 매일 먹는 신선한 주식이다. 식사빵을 예전처럼 집집마다 직접 굽는 일은 드물지만, 파리의 어느 동네든 몇 블록 안에 하루 세 번씩 완벽한 바게트를 굽는 블랑제리(boulangerie)가 있다. 그래서 정해진 시각이 되면 바게트 한두 개를 장바구니에 찔러 넣거나 손에 들고 걷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친다. 물론 바게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바게트와 함께 식탁에 올려진 음식도 보통 그날 고른 재료들로 차린다.
파리의 식사는 장보기에서 시작된다. 우리 네 삼일장, 오일장처럼 주기적으로 열리는 약 70여 개의 동네 시장, 마르셰 드 꺄르띠에 (Marché de quartier)가 있다. 이곳은 단지 저렴하기만 한 재료를 팔거나 관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베테랑 노점 상인들이 수북이 쌓아 놓은 지역 농수산물은 정오가 지나가 면 벌써 동이 나기 시작한다. 가벼운 먹거리와 와인 한잔을 곁들이며 시장의 활기를 따라 걷다 보면 '음식의 특별함은 재료에서 시작된다'는 프렌치 퀴진의 십계명이 떠오른다. 곧 제철을 맞은 7월의 토마토가 시장에 쏟아질 것이다. 알록달록 모양도 제각각의 영롱한 열매들은 그 자체로 허브 향이 가득하고 놀라운 산미를 품고 있을 것이다. 대형 마트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러야 할 때도 있지만, 이미 긴 유통 과정을 거친 '신선 코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흙냄새 위로 은은하게 풍기는 향기가 벌써 기다려진다. 파리도 대규모 유통채널의 지배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값은 그대로 두고 용량을 줄이거나 원재료의 질을 낮추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칩플레이션 (cheapflation)' 현상을 그저 모른 체하지는 않았다. 이에 맞서 노점 시장뿐 아니라 에피 스리(épicerie)처럼 장인형 소매점이나 유기농·지역 기반 매장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장을 보는 행위는 단순히 ‘무엇을 먹을까’를 묻는 것을 넘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된다.
어느 순간부터 먹는 기쁨은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이제 수많은 음식을 나와 지구의 건강을 해치는 적으로 낙인찍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음식을 단순히 영양 공급으로 보는 시대는 끝났다. 한 입을 베어 물 때마다 우리는 경제·정치·도덕적 시험대에 오른다. 그러나 건강, 윤리, 환경을 고민하기엔 인스턴트 식품으로 때우는 식사 시간은 너무 짧다. 상품화된 음식 소비에 익숙해진 우리는 농장과 도시의 멀어진 거리만큼이나 요리와 식사를 분리한 채 살아간다. 이에 기업들은 식사 전후의 이야기를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하며 비밀에 부쳐버렸다. 2010년, 프랑스인들의 식사 문화가 유네스코(UNESCO)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만우절 농담이 아니었다. 세계인들의 식사 방식이 지나치게 단일화되면서 관료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때 모두가 주창하던 '세계화'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간소화'였다. 그리고 미식에 있어서만큼은 그 간소화가 우리의 몸과 정신을 조금씩 병들게 했다. 등재 설명서에 따르면 프랑스 미식 문화의 핵심 구성요소로 '질 좋은, 특히 지역산 식재료 구입', '요리와 와인의 궁합(마리아주)', '식탁의 미적 구성', 그리고 '식사 중 나누는 대화' 등이 명시되어 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맛있게 먹는 음식은 살이 찌지 않는다"고. 그저 농담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맛있게 '차린' 음식은 살이 찌지 않는다.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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