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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28 <파리지엔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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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여전사들로 이루어진 아마존 왕국은 실재했다. 신화에 따르면 아마조네스는 남성과 떨어져 살며 스스로 전투, 사냥, 정치 등을 주도했다. 일부 전사들은 활을 더 잘 쏘기 위해 한쪽 가슴을 잘라냈다는 전설도 있다. 이제 그 후예들은 물 빠진 청바지, 빈티지한 무드의 코트, 블랙 탑, 때 묻은 스니커즈, 헝클어진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위로 냉소적인 미소를 띠고 파리지엔느(parisienne)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누빈다. 더 이상 무기를 잘 다루기 위해 한쪽 가슴을 잘라낼 필요는 없어졌지만, 여전히 신체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거부하고 어떤 자유도 억압받길 원치 않는다.

『제2의 성』(1949)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선언했다. 이 명제는 성별을 구분 짓는 기준이 생물학적 성(sex)이 아니라 사회적 성(gender)에 기반한다는 점을 일깨우며, 여성이라는 존재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아니 에르노, 주디스 버틀러, 미셸 페로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그녀의 사상과 문학적 유산을 계승해 평등을 향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파리지엔느는 여성성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체제에 '복종하지 않는(insoumise)' 고유한 페미니즘을 만들어냈다.


나는 어머니가 유일한 여성이었던 아주 작은 가족 구성원 안에서 자랐다. 여느 집처럼 가부장적 질서에 따랐지만, 어머니만큼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해내면서도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자신만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과 아버지는 기능이 단순하거나 고장난 장난감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설명서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낯설고 복잡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가령 어느 날 불현듯 시작된 어머니의 채식주의 식단은 내게 그저 결핍으로 보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책장은 서재라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는 안방 발코니 한편에 격리되어 있었다. 한 번은 터질 듯 쌓인 책들 사이에서 색색의 형광펜이 빼곡히 덧발라진 레빈슨의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1996)을 내 방으로 가져와 두고두고 읽은 적이 있다. 머리가 영글지 않았던 나는 그 내용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에게도 계절이 있나?” “여자만의 계절이 필요한가?” 하는 서툰 의문들만 간신히 품을 수 있었다. 그것이 주체로서의 여성과 억압된 욕망을 의미한다는 걸 깨달은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그저 어머니가 나와 다르다는 성의 비극과 남성으로서의 한계가 한동안 고통스러웠다. 


어머니는 자신만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단 한 해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신의 길었던 학업을 마치고 아프리카와 중동 몇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였다. 얼마 뒤, 나도 한 여성의 사적인 역사에 참여하겠다는 마음으로 한국을 떠났다.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고 매년 돌아오는 휴가철에도 아직 한 번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쩌면 이곳이 어머니의 고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파리지엔느는 파리에 살지만, 결코 프랑스 여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 미감, 자기 연출 방식을 대표하는 인물들 중에는 제인 버킨이나 카를라 부르니처럼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

어머니의 조용한 투쟁에 봄날이 왔다면 이런 풍경이었을까, 파리의 길목을 걸으며 생각해 본다. 버틀러는『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1990)에서 보부아르의 명제를 확장하며, 사회적 성을 "타고나는 것이 아닌, 일상적 행위의 반복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정의했다. 여성이 여성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파리는 자유의 여성을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무대다. 나는 또 하나의 파리지엔느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내는 이들을 바라보며, 끝내 무대에 오르지 못한 어머니를 추억한다.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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