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27 <커피가 맛없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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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커피는 맛없다" 파리의 카페를 찾은 여행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놓는 혹평이다. 버터향이 은은한 크루아상이나 쇼콜라틴 같은 달콤한 페이스트리에 고소한 커피 한잔을 곁들인 조합이 얼마나 환상적인지를 떠올려 보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독보적인 '카페 문화'를 발전시켜 왔지만, 그것이 곧 뛰어난 '커피 문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자신이 식민 지배했던 나라들에서 로부스타 품종의 커피를 들여왔다. 로부스타의 강하고 거친 맛과 들쑥날쑥한 품질을 감추기 위해 원두를 진하게 볶고, 길게 추출해 지나치게 쓴맛을 내던 방식이 일종의 '프렌치 스타일'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설탕이 쌉쌀한 에스프레소를 완성하는 마지막 손길이라지만, 프랑스에서는 거북할 정도로 쓰고 떫은맛을 눌러 없애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반면, 커피 애호가들이 말하는 '스페셜티 커피'는 오직 아라비카 품종의 원두만 100% 사용하며, 원산지 고유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약하게 볶는 것이 특징이다. 전문 바리스타가 그램과 초 단위까지 정밀하게 조절해 추출한 스페셜티 커피와 비교하면, 전통 카페의 커피 맛은 한층 더 가학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프랑스어 '카페(café)'는 커피라는 음료와 그 음료를 마시는 장소,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다른 나라의 커피 하우스들과 달리 18세기 파리에서 카페는 시민들이 '앉아서 마시며 대화하는 공간'으로서 번성했기 때문이다. 커피는 본래 쓰고 떫었지만, 카페는 그들의 달콤한 일상이었다.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살롱과 달리 누구에게나 열려있던 카페의 테이블 위에서 마침내 그 유명한 프랑스 대혁명이 조직되고 선언될 수 있었다. 19세기 산업화 이후, 노동자들은 주말이 되면 허름하고 비좁은 집에 머물거나 교회에 가는 대신, 카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카페는 노동 계급의 유일한 근대적 여가 공간에서 벗어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피난처가 되었다. 헤밍웨이, 시몬 드 보부아르, 제임스 조이스를 비롯한 수많은 대문호들의 작품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오늘, 파리의 카페 신(scene)은 미국에서 건너온 진지한 커피 문화와 산미가 강조된 트렌디한 커피를 둘러싸고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맛과 향에 영향을 미치는 총체적 환경을 뜻하는 '떼루아(terroir)'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자, 분석적인 미각을 자랑하는 소믈리에의 나라 프랑스는, 미감의 최전선과 오래된 카페 유산 사이에서 스스로의 길을 묻고 있다.
2유로짜리 에스프레소 대신 6유로의 플랫 화이트를 마신다고 해서 프티부르주아적인 사치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커피 생산국 노동자들이 착취의 대가로 손에 쥐는 몹시 적은 수익을 생각하면 커피는 여전히 저렴한 편이다. 한편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대형 유통업체들이 에스프레소 머신을 무상 제공하며 끼워 넣은 이름 모를 원두, 그리고 그것을 침 흘리듯 길게 추출한 지루한 커피 맛까지 옹호할 수는 없다.
한 때 실존주의나 초현실주의의 아지트를 자처하던 카페들은 이제 '추억의 장소'로만 제자리를 지킬 뿐이다. 여행객으로 문정성시를 이루는 힙스터 카페를 피해 골목길의 이름 모를 카페테라스에 앉아 글을 쓰기도 하지만, 문학이나 예술 활동과 카페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을 찾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패스트푸드점, 체인 카페, 스페셜티 커피숍에 자리를 내어주던 전통 카페들은 코로나 대유행 이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하얀 셔츠에 검은 앞치마를 입은 종업원(garçons de café), 그리고 나란히 앉아 세상을 마주 보며 사람 구경을 즐기던 손님들의 풍경도 머지않아 사라질지 모른다.
"커피 한 잔 할래?"라는 물음 속엔 관계에 대한 열정, 서로에게 기꺼이 내어줄 시간 같은 풍요로운 낭비가 담겨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핑계 삼아, 커피가 맛없는 카페에서, 싸구려 커피 한 잔 값으로 그 산책 같은 시간을 빌릴 수 있었다.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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