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혁의 <학부모와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한 스푼>-신라 시대의 화랑도: 교육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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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초상
고구려 경당, 신라 임신서기석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신라 시대의 화랑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화랑도는 청소년들이 리더십과 교육을 통해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화랑도는 신라 진흥왕 37년(576년)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전에는 미인을 선발하는 '원화'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화 제도는 두 미인 남모와 준정 사이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이 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 至醉, 曳而投河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興王 37年
(진흥왕) 37년(576)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 무리들을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후 발탁해 기용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미녀 2명을 뽑았는데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서로 시기하여 다투었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여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
이 사건이 있은 후, 화랑도가 설립되었습니다. 화랑도는 임금과 신하들이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등용하는 더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주로 귀족 출신의 젊은이들이 화랑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외모뿐만 아니라 도덕성과 리더십도 겸비해야 했으며, 서로의 도덕과 지성을 연마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其後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故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興王 37年
그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뽑아 단장하고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들을 받들었는데,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기뻐하였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그 중 착한 사람을 뽑아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말하기를, “현명한 보좌진과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어진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
화랑도는 음악과 시를 즐기며 자연을 탐험하고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명산대첩을 찾아다니며 학문과 무례, 음악과 예술까지 연마한 종합적인 교육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훌륭한 보좌진과 충신, 용감한 병졸들이 화랑도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을 보면 화랑도가 단순한 교육 기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이끌 정도로 중요한 인재를 양성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랑도의 정신을 가장 잘 정리한 분은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로 유명한 최치원(857년-900년)입니다. 그는 난랑(鸞郞)이라는 화랑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笁乾太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三國史記』卷4, 「新羅本紀」4 眞興王 37年
최치원(崔致遠)은「난랑비(鸞郞碑)」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으니, (이를) 일러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곧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많은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장차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이 노(魯)나라 사구(司寇)의 가르침이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말없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주나라 주사(柱史)의 근본이요, 모든 악을 만들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가르침이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이 『신라국기(新羅國記)』에서 말하기를, “귀인(貴人)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르기를 화랑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어 섬겼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4 진흥왕 37년-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서 언급된 화랑도의 교육 철학은 유교, 불교, 도교를 아우르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는 '풍류'라고 불리는 신라 시대의 정신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교육은 신화나 전설을 통해 전해지는 동양의 영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유교의 효도와 충성, 불교의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가르침, 그리고 도교의 자연을 존중하고 소박하게 생활하는 철학을 폭넓게 아우릅니다.
화랑도의 이 교육 방식은 구성원들이 단순히 무예나 예술에 능숙한 것을 넘어 도덕적이고 지적인 면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했습니다. 또한, 이는 사회의 다양한 계층에서 온 청년들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통합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리더십, 도덕성, 사회적 책임의 가치를 강조하는 화랑도의 교육 철학은 오늘날에도 그 중요성이 변치 않습니다. 이 역사적 교훈을 프랑스에서 한글을 배우는 학생들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실현할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해 보는 한 주가 되면 좋겠습니다.
<역사학자, 이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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