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의 <파리의 연인들>(9)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그리고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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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파리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폴 사르트르는 파리 를 대표하는 두 철학자로, 실존주의 사상을 창시하여 지적 사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감했으며, 센강 좌안에 있는 카페와 거리를 활보했다. 생제르맹 데 프레 성당 맞은편에는 “사르트르-보부아르”라는 이름의 광장이 있을 정도다. 이 전설적인 커플의 삶을 따라 파리 곳곳을 되짚어 보자.
장폴 사르트르는 1905년 파리 16구 미냐 르 거리 13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동안 뫼동에서 살다가 1911년부터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 5구로 이사했다. 그는 <말, Les mots>에서 이 시기를 감성적으로 회상하며 "내 운명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파리 5구 르 고프 거리에 있는 한 아파트의 5층에서"라고 적었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 역시 이 건물에 거주한 적이 있으며, 이곳은 팡테옹에서 가까운 문학의 중심지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태어날 때부터 몽파르나스 지역과 깊은 인연을 가졌다. 그녀는 1908년 몽파르나스 대로 103번지, 유명한 라 로통드 카페 바로 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안 좋아지면서 곧 렌 거리 71번 지의 엘리베이터도 없고 수도 시설도 없는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해야 했다.
사르트르는 고교 동창 폴 니잔과 함께 고등사 범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장난기 많은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교수들이 인정할 정도의 비범한 지성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시기, 보부아르는 당페르 로슈로 대로 91번지에 위치한 할머니의 아파트 로 이사하며 독립을 꿈꿨다. 그녀는 이때부터 결혼 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이는 그녀의 자유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1929년, 두 사람은 철학 교수 자격시험 준비 모임에서 만난다. 사르트르는 이 시험에 1년 전 낙방했지만, 1929년에는 1등으로 합격했고, 보부아르는 2등을 차지했다(한 심사 위원이 보부아르를 1등으로 할지 고민했다 는 소문이 있다). 이후 두 사람의 삶은 깊이 얽히게 된다. 철학 교수 자격을 딴 후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보부아르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몰리에르 고등학교에서 가르쳤으나, 한 학생과의 관계로 인해 1939년 학교에서 해고되었고, 1943 년에는 "미성년자 타락 선동" 혐의로 교육부 에서 정직 처분을 받았다.
전쟁 후 복직 제안을 받았지만, 보부아르는 이를 거절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한다. 전쟁 중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카페 드 플로르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냈다. 이곳은 난방이 잘되어 있어 좋았다. 사르트르가 라옹으로 발령받은 후 보부아르는 몽파르나 스의 돔 카페에서 아침을 먹곤 했다. 전쟁 후에도 두 사람은 카페 문화에 깊이 빠져, 클로 즈리 데 릴라 카페에서 모리스 메를로퐁티, 나탈리 사로트 등과 어울리며 철학과 문학을 논했다.
낮에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밤이 되면 바와 재즈 클럽으로 향했다. 특히 ‘르 타부’라는 클럽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이곳은 자정 이후까지 문을 여는 몇 안 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후 소음 문제로 클럽이 문을 닫자, 두 사람은 보리스 비앙과 함 께 클럽 생제르맹으로 장소를 옮긴다. 하지만 이곳 역시 점차 인기 명소가 되면서 두 사람은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 떠나게 된다. 자유를 중시한 두 사람은 함께 거주하는 대신 각자의 공간을 유지했다. 그들은 6구의 스튜디오와 호텔을 전전하며 가끔은 서로 인접한 방을 빌리기도 했다.
미스트랄 호텔과 덴 마크 호텔, 루이자 호텔 등은 이들이 거주한 대표적인 곳이다. 사르트르는 생의 마지막 10 년을 에드가르-키네 대로 29번지에서 보냈 고, 보부아르는 1955년부터 1986년까지 빅토르 슐레르 거리 11bis 번지에서 거주했다. 사르트르는 1980년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5만 여 명이 참석해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보부아르는 6년 후 사르트르 곁에 묻혔으며, 그녀의 손가락에는 연인 넬슨 알그렌이 첫날밤 을 기념해 선물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
두 거장의 열정적인 사랑은 강렬했지만 비극적으로 끝을 맺었다. 험난한 삶을 살아온 “노래하는 작은 참새 피아프”는 최고의 성공 을 누리던 시기에 미국 순회 공연 중 권투 선수 마르셀 세르당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에게 잔인한 비극을 선사하였다.
에디트 지오반나 가시옹은 1915년 12월 19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피아프를 버렸고, 어린 피아프는 가난한 할머니 밑에서 거의 방치된 채 자랐다. 이후 그녀는 매춘업소를 운영하는 다른 할머니에게 맡겨지며 조금은 더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한다.
8살이 되자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며 허름한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금빛 목소리를 지닌 그녀는 “작은 참새”라는 별명을 얻었다. 13살이 되자 피아프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친구 모몬과 함께 거리 생활을 한다. 그녀는 루이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졌고, 18세에 딸 마르셀을 낳지만 불행히도 딸은 두 살에 세상을 떠난다.
피아프는 거리에서 노래를 계속했고, 마침내 음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된다. 그녀의 뛰어난 목소리와 기구한 삶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잇따라 성공을 거둔다. 1937년에는 유명 스타로 자리매김하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사랑 받는 가수가 되었다. 1946년, 피아프는 대표곡 <장미빛 인생> 을 작곡하고, 2년 후 미국 순회공연 중 뉴욕 의 “르 베르사에” 카바레에서 이 곡을 부른 다. 그날, 챔피언 권투 선수 마르셀 세르당이 그녀의 공연을 보러 왔다. 당시 세르당은 프랑스와 유럽 챔피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결혼해 네 자녀를 둔 아버지였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세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 강렬한 사랑에서 영감을 받아 피아프는 <사랑의 찬가>를 작곡하게 된다.
세르당은 1916년 프랑스령 알제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모로코로 이주했다. 평범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권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모로코 폭격기’ 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피아프와의 사랑은 미디어에 대서특필되었고, 세르당이 유부남임에도 대중은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사랑은 1949년 10월 27일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피아프의 간절한 요청에 세르당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급히 탑승했다. 자리가 없 어 포기할 뻔했지만 한 커플이 자리를 양보해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아조레스 제도에서 추락해 세르당은 목숨을 잃었다. 이 비극 이후 피아프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고 고통을 잊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모르핀을 복용하게 된다. 세르당의 아내와 아이들을 경제적으로 돕기 위해 그녀는 그들을 파리의 고급 주택에 살게 했고,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세르당의 흔적을 곁에 두려 했다. 피아프는 이후 수많은 연인을 거쳤으며, 1952년 가수 자크 필스와 결혼하지만 이혼한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평생 세르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피아프는 만성 질환과 정신적 고통으로 점점 더 술과 모르핀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1963년 10월 10일, 47세의 나이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녀의 오랜 친구 장 콕토는 그녀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녀만큼 자신의 영혼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영혼을 소비하지 않고, 그저 아낌없이 베풀었으 며, 금처럼 창밖에 던지곤 했다.“
피아프와 세르당의 강렬한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들의 사랑은 <사랑의 찬가> 를 통해 프랑스 샹송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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