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혁의 <학부모와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 한 스푼>-고구려의 청소년 교육 기관, 경당(扃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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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의 수렵도 벽화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프랑스에서 학습하는 청소년들에게 한국사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고 느끼며, 이 시리즈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깊고 흥미롭게 접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첫 번째 주제로 고구려(기원전 37년~서기 668년)의 교육 기관인 경당 을 소개합니다. 경당은 단순한 학문의 장소가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학문과 군사 기술을 함께 교육한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인의 삶과 문화, 그리고 교육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당서』의 기록: "俗愛書籍, 至於衡門 廝養之家, 各於街衢造大屋, 謂之扃堂, 子弟未 婚之前, 晝夜於此讀書習射." ("풍속은 서적을 매우 좋아하여, 보잘것없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기 거리마다 큰 집을 짓고 이를 경당이라 부르는데, 아직 혼인하지 않은 자제는 이곳에서 밤낮으로 독서하고 활쏘기를 익힌다.")
『신당서』의 기록: "人喜 學, 至窮里廝家, 亦相矜勉, 衢 側悉構嚴屋, 號扃堂, 子弟未婚 者曹處, 誦經習射." ("사람들은 학문을 좋아하여, 마을의 궁벽 한 곳의 보잘것없는 집에 이르 기까지 또한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서 거리 모서리마다 큰 집을 짓고 경당이라고 부르는데, 미혼인 자제를 무리 지어 살도록 하고, 경전을 읽으며 활쏘기를 연습한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독서를 매우 좋아했으며, 경당에서는 책 읽기와 군사 훈련이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경당은 단순한 학교를 넘어 사회적, 문화적, 군사적 기능을 가진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신당서』역시 고구려의 교육 시스템이 여러 계층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했다고 설명합니다. 고구려인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당시 중국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당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많은 학자들은 372년 소수림왕이 태학을 설립한 뒤, 특히 427년 평양 천도 이후 본격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 다. 고구려 멸망 후 경당은 사라졌지만, 통일 신라와 발해에서 그 전통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 제도는 고구려가 5세기에 문화와 군사적으로 황금기를 맞이 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구려 경당에 대한 기록은 자연스럽게 무용총의 벽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고분은 중국 지린성 지안현 통구에 위치해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1935년 일본 학자들이 발굴한 이곳은 고구려의 문화와 군사적 특징을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 벽화는 고구려인들의 씩씩한 기상과 강인한 용맹을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경당에서는 학문뿐만 아니라 활쏘기 같은 군사 훈련도 이루어졌고, 이는 수렵도에 묘사된 활쏘는 고구려인들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경당에서 배우고 연습한 청소년들이 장성하여 말을 타고 힘차게 활을 쏘며 사냥을 했을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수렵도는 단순한 사냥 장면이 아니라, 경당에서 익힌 무예와 용맹이 실전에서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경당이 실용적인 학습의 장이었음을 시사합니다.
프랑스 각지의 한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청소년 여러분, 그리고 자녀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시는 학부모님들, 여러분의 노력과 열정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고구려인들의 씩씩한 기상과 배우기를 좋아하는 열정을 본받아, 여러분이 슬기롭고 당당하게 성장해 나가길 바랍니다.
배움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여러분의 정체성과 뿌리를 찾고 미래를 열어가는 과정입니다.
다음 호에서도 교육과 관련된 사료를 소개하며, 청소년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역사학자, 이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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