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의 <파리의 연인들> (4) -베를렌과 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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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Fantin-Latour 가 그린 ‘By the Table’의
베를렌(왼쪽)와 그 옆이 랭보
저주받은 시인들이자 위험한 연인인 베를렌과 랭보는 술과 폭력으로 점철된 혼돈의 2년을 살았다. 하지만 이 2년은 또한 이 두 사람이 프랑스 문학사에서 가장 치열한 지적 모험을 벌이며 영원히 기억될 시들을 써낸 창조의 역사이기도 하다.
랭보와 베를렌은 매우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그 영향으로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그들이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도 왜곡되어 있었다.
베를렌의 부모는 결혼하고 13년이 지난 1844년에 베를렌을 낳았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기 전에 세 차례나 아이를 유산했다. 그녀는 이때의 충격으로 태아를 유리병에 넣어두고 말을 걸곤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한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유리병 속에 든 태아보다는 덜 오싹하지만, 어렸을 때 베를렌은 다른 아이들 과 외모를 비교당하면서 자랐다. 물론 그가 썩 잘 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이 일은 그에게 깊은 상 처를 남겼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사건이 있다. 1836년, 베를렌 가족은 엘리사라는 고아 소녀를 입양했다. 베를렌은 그녀와 함께 자랐지만, 그는 그녀를 여동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엘리사를 사랑했고 결혼까지 생각했다. 그렇지만 엘리사는 부유한 제당업자와 결혼했고,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베를렌은 이때 받은 상처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랭보라고 해서 베를렌보다 나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다섯 명 의 자식을 버렸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자식들로부터 사랑받는 것만 빼놓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랭보는 어머니를 “마더(Mother)”라고 부른다. 이것은 엄숙하지도 않고 다정하지도 않은 이상한 단어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억압적이고 남을 비하하는 인물을 후려치는 단어다.
“(...) 그리고 어머니는 숙제장을 덮더니 만족한 듯 아주 자랑스럽게 나가 버렸다. 귀여운 아들의 푸른 눈 속에, 그리고 영리한 이마에 감춰져 있던 본심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곱 살짜리 시인들>, 랭보-
이 젊은 시인은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시집을 내고 싶어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전혀 격려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어머니는 아들이 파리에 가서 이름을 알리고 싶다고 말하자 그의 뺨을 때리며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자 랭보는 가출을 했다.
베를렌과 랭보
어쨌거나 그는 1871년 9월 결국 파리에 도착하여 그가 두 편의 시를 보냈던 베를렌을 만난다. 그보다 1년 전에 베를렌은 이제 열일곱 살이 된 아름다운 마틸드를 아내로 맞았다. 그녀가 아이 낳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랭보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그녀를 떠난 뒤였다. 극도로 소심한 베를렌은 창녀들의 단골손님이었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사창가를 드나들었다. 그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파리코뮌이 발생하여 파리가 큰 혼란에 빠져 있던 1871년 5월 어느 날 밤, 베를렌은 자기 어머니를 돌보라며 마틸드를 집 밖으로 내보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걸어가다가 하마터면 총에 맞아 죽을 뻔 했다. 그동안 베를렌은 또 사창가를 찾아갔다.
1872년 1월, 랭보와 베를렌의 사랑은 절정에 이른다. 베를렌은 랭보를 자기 처갓집에 묵게 했다. 마틸드는 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짐작하고 있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몇 달 동안 그럭저럭 랭보의 존재를 참아냈다.
1872년 7월, 랭보도 웬만한 파리 사람들은 다 알고 충격을 받은 이 같은 상황에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그는 베를렌의 손을 잡아끌고 브뤼셀로 데려간다. 그러자 마틸드는 즉시 법적 별거를 요구한다. 이 소식을 들은 빅토르 위고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군! 불쌍한 베를렌 부인 같으니! 아이는 또 무슨 죄란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
베를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했다. 사랑하는 엘리사가 죽자 그는 술에 취해 여러 차례나 어머니를 죽일 뻔했다. 결혼하고 나서 그의 알코올 중독은 더 악화되었다.
그는 알코올 도수가 40도에서 90도나 되어 사 람들을 미치게 만든다는 “초록색 요정” 압생트를 퍼마셨다. 압생트를 마시고 공격적으로 변한 베를렌은 심지어 마틸드를 성폭행하고 아기를 때리기까지 했다.
랭보 역시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었다. 이제 막 파리에 도착하여 사교계 파티에 참석 했던 랭보는 한 유명한 사진작가를 공격하여 공개적으로 비난받았다. 이때 그는 만취 상태였다. 랭보와 베를렌은 런던으로 도피했을 때도 대부분의 시간을 술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술에서 깨면 싸우거나, 아니면 행패를 부렸다. 헤어졌다 만났다를 수없이 되풀이하던 베를렌과 랭보는 1873년 7월 10일 브뤼셀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랭보는 지겨워하면서 이 숨 막히는 관계를 끝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베를렌은 자살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서 23프랑을 주고 르포쇠 권총(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890년 같은 달, 반 고흐도 르포쇠 권총으로 자살했다) 을 샀다. 호텔로 돌아온 베를렌은 랭보가 같은 위협을 되풀이하자 그에게 두 발을 쏘며 소리쳤다. “자, 네가 날 떠난다고 해서 쏘는 거다!” 한 발은 마룻바닥에 박혔고 다른 한 발은 랭보의 손목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얼마 안 있어서 출판될 <지옥에서의 한 철>을 위해서는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랭보는 자기는 생각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고 나서 돌아섰다.
베를렌은 그에게 다가가다가 손이 호주머니에 닿았다. 그가 권총을 꺼낸다고 생각한 랭보는 경찰을 불렀다. 베를렌은 즉시 구금되었고, 랭보가 고소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뒤에는 폭력행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여기에 동성애자이고 파리코뮌에 가담했다는 혐의까지 추가되는 바람에 그는 중형을 선고받아 55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강제 해독 치료도 받고 다시 가톨릭으로 귀의했지만 베를렌은 가족에게도, 연인에게도 돌아가지 못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랭보를 만나 이틀 반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 물론 두 사람은 그 뒤에도 계속 편지를 나누었지만,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베를렌은 10년의 세월의 지나고 나서야 문단으로 다시 돌아갔다.
1885년 그는 술에 취해 함께 살고 있던 어머니의 목을 졸라 죽이려고 하다가 감금되기도 했다. 그는 매독과 급성폐렴에 걸려 1896년 쉰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랭보는 1875년 시 쓰는 것을 포기하고 유럽에 이어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성과 함께 살았고, 잠시 무기를 밀매하기도 했으며, 이슬람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그는 오른쪽 무릎 통증이 심해지자 1891 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다리를 잘라냈지만 암이 계속 진행되어 결국 그는 11월 서른일 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확실히 서로에게 탄복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호적이지 않았다. 베를렌은 평생 동안 랭보를 사랑하며 그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랭보에게 두 사람의 사랑은 시작과 끝이 있는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랭보 전기 작가, 장-자크 르프레르-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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