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파리광장 답사기- 소르본 광장 (Place de la Sorbonne),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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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본 대강당 출처: 소르본 대학 사이트
영혼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듯 멍한 상태로 비틀거리며 공포의 대강당 수업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나에게 아프리카 콩고에서 온 청년 에밀이 다가와 인사를 한다. 아프리카라... 그래! 아프리카에서는 바나나와 생선을 같이 요리해서 먹는다는 것을 만화에서 본 적이 있다.
-에밀, 바나나와 생선이 어울리니?
-물론이지. 그런데 그 바나나가 그냥 바나나하고 달라.
우리는 Marché Barbès에서 그 특별하다는 바나나를 샀다. 오는 길에 생선가게에 들러 고등어도 샀다. 내 다락방에 도착한 나와 에밀은 쇼핑한 바나나와 생선을 꺼낸다. 에밀이 프라이팬을 잡았다. 그리고는 기름을 두르고 바나나와 생선을 올린다. 요리란 그 재료와 향신료, 그리고 누가 하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다. 이 생소한 조합의 음식은 무척 어색하여서 크게 나의 식욕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런 저런 이야기 보따리가 펼쳐졌다. 에밀은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산문 작품의 작가에게 수여되는 공쿠르상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은 그에게 있어 아름다운 세상이란 상상력이 동원되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에밀은 프랑스에 머물면서 자신의 고향에서와는 또 다른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대도시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했던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 표지 : 아마존
2021년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이란 작품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작가로는 역대 최초로 공쿠르상을 수상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문득 나의 에밀이 떠올랐다. 나는 하늘을 보면서 그가 커다란 나무 아래의 그늘에서 글을 쓰는 모습의 별자리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대자연의 녹지에서 글을 쓰는 에밀 앞으로 코끼리들이 유유히 지나간다. 에밀은 아이들이 자원 전쟁의 노예가 되어 하루 종일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는 현실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있지 않을까?
세상의 변화에 대한 욕망의 주위에는 다양한 단어들이 뒤엉키며 부유한다.
변혁, 전복, 반란, 혁신, 봉기 그리고 혁명 등. 이 중 혁명이란 단어가 프랑스혁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 시기에 한반도에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만국약사(萬國略史)는 1896년에 한반도에 선보인 근대 세계사 교과서이다. 이 교과서에 ‘프랑스혁명’이라는 말이 소개된다. 이 책에서 기술하는 프랑스혁명은 백성들의 반란이자 민란으로 묘사된다. 승려와 왕족이 참혹히 살육당하고 권력을 손에 넣은 무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분열과 혼란의 시기라는 관점이다.
19세기 말 한반도에서 프랑스를 설명하는 최초의 서양사 요약본들은 한결같이 나폴레옹 황제를 찬양하는 내용을 기술하면서 애써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찾으며 마무리된다. 당시가 황제임을 선언한 고종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있던 왕정의 시기였음이 그 이유일 것이다. 한반도 역사상 근대 최초의 신문들 중 하나인 황성신문사가 1900년 6월 법국혁신전사(法國革新戰史)라는 책을 발간한다. 이 단행본에도 프랑스혁명(佛蘭西 革命)의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현대 한국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한 근대 한반도 글쓰기의 단어 하나 하나를 해석해가며 들여다보았지 만, 이전에 발행된 만국역사와 크게 달라진 견해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1900년 황성신문사에서 발행된
법국혁신전사(法國革新戰史). 출처 : 대한민국 국립 도서관
혁명이란 단어는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에서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도는 순환 운동을 묘사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가리키는 말로 변화하였다.
1649 년 찰스 1세가 처형당한 뒤 나온 영국의 왕당파 문건에서는 이 단어가 순환 운동이 완결되어 ‘원래의 상태대로 돌아갔다’는 뜻으로 쓰였다. 아마도 아프리카 콩고에서 온 에밀이 기획했던 혁명적 글쓰기는 자신의 고향 이 제국의 약탈자들이 도착하기 이전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강창일>
파리 8대학 연극영화 박사, 파리 10대학 비교 문학 연구자, 무성영화 변사. 프랑스 방방곡곡을 누비며 강연회와 상영회를 통하여 한국영화를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 Les Débuts du Cinéma en Corée »(Ocrée Editions, 2021), « Le Cinéma Coréen Contemporain : A l'Aube de Parasite »(Ocrée Editions,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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