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프로방스 여행> 연재(32) -마노스크: 장 지오노가 찾으려 한 행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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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연재 이후,
<프로방스 여행-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연재합니다.
연재를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보니유 : 기원전 3세기의 로마 다리
북쪽을 향해 깊은 계곡을 20분쯤 달리던 자동차가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자 저 멀리 높은 언덕에 올라앉은 보니유(Bonnieux)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1,5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 들어서면 흙을 구워 만든 기와로 지붕을 덮은 집들과 17세기에 지은 아름다운 저택들을 볼 수 있다. 보니유는 주교들이 살아서 오랫동안 번성한 마을이었다.
마을 위쪽에서 86개의 계단을 오르면 옛 성당과 수백 년 된 서양 삼나무, 라벤더밭이 나타나고 저 아래로는 돌이 깔린 골목길과 바, 식당, 허브를 파는 가게, 시청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다. 마주 보이는 라코스트 마을 너머로 넓은 평원이 내려다보인다.
보니유의 로마 다리 전경
보니유에서 북쪽으로 5km를 가면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로마 다리가 있다. 쥘리앵 다리(Pont Julien)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길이 80m, 높이 11m에 3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지난 2005년까지도 자동차가 이 다리 위를 다닌 것으로 보면 퐁뒤가르와 함께 로마 건축 기술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압트 : 프로방스 당과의 원조
또 한 명의 프로방스 작가 장 지오노를 만나러 동쪽으로 60km가량 떨어진 마노스크까지 차로 달리다 보면 압트(Apt)라는 작은 도시가 나타난다. 압트는 설탕으로 절인 과일, 즉 당과로 유명하다.
프로방스는 프랑스에서 과일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과일은 상하기 쉬워서 옛날에 프로방스에서 이 많은 과일을 보존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설탕에 절이는 것뿐이었다.
압트의 당과
압트는 14세기부터 당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이 동네 출신의 제과업자 두 사람이 아비뇽 교황청에서 교황이 먹는 당과를 만드는 일을 한 덕분이었다. 17세기부터 많은 압트 주민들이 당과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였다. 진정한 예술 작품이 된 압트 당과는 그 맛이 오묘해서 명성이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파리 사람들을 매혹시킨 압트 당과는 유럽의 모든 궁정에 이어 전 세계 사람들의 식탁에 올랐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압트는 당과의 원조 도시로서 그 명성을 날리고 있다.
당과
질 좋은 당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일이 아직 단단하고 향을 가장 강하게 풍길 때 따야 한다. 당과를 만드는 원리는 얼핏 단순해 보인다. 즉 과일에 함유된 물을 설탕 시럽으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을 한 번만 해서는 안 되고 과일의 성질과 크기에 따라 여러 번 계속해서 설탕물에 담가야 한다. 과일은 우선 펄펄 끓는 물에 빠르게 담갔다가 약한 시럽 속에서 익히는데, 이 시럽은 과일에 완전히 배어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 킬로미터 정도 되는 같은 종류의 과일을 담을 수 있을 만큼 큰 사암 수반에 과일을 오랫동안 담가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 조금 더 진한 시럽에 과일을 담그고, 다시 그보다 조금 더 진한 시럽에 과일을 담그는 작업을 되풀이한다. 이런 작업이 8주 동안 계속되고, 크기가 큰 과일은 시간이 더 걸린다. 과일에 설탕이 적절히 배어들어야 이 과일이 정상적으로 보존된다.
중요한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과일이 반짝반짝 빛나 보이려면 뜨거운 시럽에 절여야 한다. 즉 아이싱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면 일종의 보호막이 형성되어 보석처럼 빛이 나고 손가락에도 달라붙지 않는다.
당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과일은 멜론과 복숭아, 밀감, 배, 체리다.
마노스크 : 장 지오노가 찾으려 한 행복의 의미
《나무를 심은 사람》을 쓴 장 지오노(1895~1970)는 엑상프로방스 북쪽의 알프드오트프로방스 지방에 위치한 인구 2만 2천 명의 도시 마노스크(Manosque)에서 태어나고 죽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부모를 돕기 위해 고등학교에 가지 않고 은행에 취직을 해야만 했다. 그 이후로 고전 작품을 읽으며 독학으로 문학적 교양을 쌓았다. 그는 1915년 징집되어 전장에서 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후,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이 전쟁의 공포와 부조리를 1931년 출판된《엄청난 무리》라는 작품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루소처럼 단순한 삶을 살자고 권유하는 한편, 결국은 전쟁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산업사회를 거부하자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그를 중심으로 ‘콩타두르 운동’이 결성되었는데, 이 평화주의 단체는 1935년부터 마노스크 북쪽의 콩타두르 고원에서 아홉 차례 모임을 가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39년, 지오노는 평화주의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개월 동안 억류된다. 이 기간 중의 행동으로 인해 그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나치 독일에 맞서 무력 투쟁하는 것에 반대하고 비시 정부 소유의 신문에 글을 실어 대독 협력자라는 비난을 받은 그는 해방되자 체포되었지만, 기소되지 않고 5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전쟁은 그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의 배경인 바농과 뒤로 루르산이 보인다.
지오노는 다시 고향인 마노스크로 돌아갔다. 대도시(특히 파리)를 싫어해서 이곳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움직이지 않는 여행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중앙 문단이 불편하게 느껴져 다른 작가들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은 지역 작가였지만, 그가 쓴 이야기는 지역을 벗어나 그 어느 작가의 작품보다 더 보편적이다.
1953년에 출판된《나무를 심은 사람》은 지오노의 중편소설이다.〈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응모하기 위해 쓴 이 소설은 시대를 앞서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선구자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르는 헐벗은 프로방스의 산에 40년 동안 나무를 심는다. 이 작품의 화자는 그가 평생을 바쳐서 하는 이 일을 ‘신의 일’에 비교한다. 벌을 키우는 사람이 된 이 양치기는 자신이 이룬 숲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러나 지오노는 한발 더 나간다. 이 숲이 생기면서 마을이 생기고 많은 가족이 이 마을에서 살게 된다. 요샛말로 하면 지속적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엘제아르 부피에르는 바농의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둔다. 그야말로 진정한 프로방스 사람이었다.
마노스크 북쪽의 산악지대에 있는 바농과 이 마을이 등을 기대고 있는 뤼르산이 바로 《나무를 심은 사람》의 배경이 된 곳이다(“알프스산맥이 프로방스 지방으로 뻗어 내린 아주 오래된 산악지대”).*
존재한 적은 없지만 책을 통해 유명해진 이 양치기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바농 마을의 교회로 올라가는 길에는 ‘엘제아르 부피에르 오르막길’이라는 표식이 있다.
지오노는 열한 살 때 바농에서 생전 처음 여행에 입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5프랑을 주며 이 돈으로 혼자 가장 긴 여행을 해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가 마노스크에서 마차를 타고 와서 처음 내린 곳이 바로 바농이었다. 바농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는 당나귀를 타고 북쪽에 있는 뤼르산을 넘어간다. 그리고 자브롱 계곡을 걸어 시스트롱에서 기차를 타고 마노스크로 돌아갈 것이다.
* 장 지오노,《나무를 심은 사람》김경온 옮김, 두레, p.10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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