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연재 - 콜마르의 음식 슈크루트, 옹플뢰르, 에트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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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마르의 음식 슈크루트(Choucroute)
슈크루트는 우리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작품으로 잘 알고 있는 프랑스 동부, 독일과 라인강을 가운데 놓고 마주보고 있는 알사스 지방의 음식이다.나는 2022년에 콜마르에서 순전히 감만 믿고 들어간 한 식당에서 인생 슈크루트를 먹었다. 이 지방의 각 마을은 나름대로의 슈크루트 요리법을 갖고 있다 한다. 간수로 발효시킨 흰 배추를 바닥에 깔고 여러 종류의 소시지와 돼지 비계, 소금에 절인 돼지 어깨 부위, 훈제 햄, 감자 등을 얹어서 맥주나 백포도주(알사스 산 리슬링이나 실바네르)와 함께 먹는 이 요리야말로 알사스 지방의 상징이다.
이 요리에 쓰는 흰 배추는 보통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종류보다 훨씬 커서 무려 7킬로씩이나 나가는 것도 있다. 이 흰 배추는 이 지역의 북부에서 재배, 7월에서 11월 사이에 수확한다. 수확한 배추는 겉껍질과 속심을 제거한 다음 최대한 얇게 써는데, 지금은 대부분 이 작업을 기계로 해내고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만 해도 슈크루트를 파는 상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에게 이 배추를 사들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각 가정에서는 겨울에 먹을 양을 집에 저장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슈크루트
자, 그럼 슈크루트의 맛을 결정하는 이 배추 절임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보자. 흰 배추를 얇게 썰어서 흙으로 빚거나 나무로 만든 항아리에 배추, 소금, 배추, 소금... 식으로 번갈아가며 쟁인다. 그러면서 독특한 맛을 내기 위해 노간주나무 열매를 집어넣는다. 그런 다음 압착을 시키는 것인데, 가정에서는 나무 뚜껑을 덮고 무거운 돌을 올려놓으면 된다. 그러면 소금이 배추의 수분을 흡수하면서 간수가 생기고, 이 간수 덕분에 배추가 오래 저장되는 것이다. 발효는 기온에 따라서 짧게는 3주일, 길게는 8주일이 걸린다.
그러고 나면 무게는 절반 가량으로 줄어들지만, 이 절인 배추야말로 망간, 아연, 불소 따위의 성장에 필요한 미량원소들과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어서 건강에 아주 좋다. 그래서 농민들은 슈크르트로 겨울에 비타민 C를 보충했고, 바닷사람들은 오랫동안 고기잡이를 나갈 때는 슈크루트를 가지고 나가서 괴혈병을 예방하였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비타민은 익히지 않은 것이 건강에 가장 좋다. 좋은 슈크르투 배추는 사각사각하고, 색깔이 또렷하며, 냄새가 너무 강하지 않아야 한다.
이 흰 배추는 원래 중국산이다. 만리장성을 쌓는 일꾼들이 이걸 먹고 건강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을 몽고족과 타타르족이 유럽에 들여왔다. 또한 발효한 배추는 발칸제국 국가들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고, 알사스 사람들은 중세 때부터 이것을 먹어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슈크루트는 돼지고기와 먹어야 가장 잘 어울린다. 제대로 된 슈크르트에는 훈제햄과 삶은 고기, 뒷다리 관절 부위 살, 간으로 만든 동그랑땡, 순대, 굽거나 훈제한 소시지, 스트라스부르그 소시지, 굵고 짧은 소시지 등 온갖 형태의 돼지고기가 다 들어간다. 또한 프랑스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이 슈크루트 배추가 한국의 시큼한 김치 맛을 내므로 김치가 없을 때 찌개를 해서 먹어도 아주 좋다.
콜마르
▯ 옹플뢰르(Honfleur)
옹플뢰르는 12세기부터 센 강 을 통해 영국으로 상품을 수출하는 항구도시였고, 백년전쟁 때부터는 센 강이 바다로 나가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서 전략적으로 요충지 역할을 해냈다.
14세기에 샤를 5세는 옹플뢰르를 요새화하여 영국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이 항구는 오히려 14세기와 15세기에 두 번이나 영국인들에게 점령당하기도 했다.
옹플뢰르
그 이후로 18세기말까지 옹플뢰르는 조선과 해상무역, 장거리 원정 덕분에 계속 발전했다. 특히 16세기와 17세기에는 아메리카 대륙과 캐나다, 루이지애나, 서인도제도, 아프리카 해안으로의 원정이 빈번하게 이루어져 수많은 배들이 이 항구를 떠나갔으며, 특히 1608년에는 사무엘 드 샹플렝이라는 사람이 퀘벡 시를 세우기도 했다. 이 항구는 또 대구잡이로도 유명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식민지를 잃어버리고 근처의 아브르 항구와 경쟁을 해야 하는데다 프랑스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치하의 대륙봉쇄조치로 옹플뢰르는 예전의 영화를 많이 잃어버렸다. 다행히 옹플뢰르는 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과는 달리 폭격을 당하지 않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옹플뢰르의 으젠 부댕 미술관
옹플뢰르는 인상파의 선구자로 여겨지며 해양화의 대가인 으젠 부댕(1824-1898)의 고향이기도 하다. 오르세 미술관 1층 18번 전시실에 가면 모네의 <로슈 누아르 호텔, 트루빌>(1870) 오른쪽에 그가 그린 <트루빌 해변(La Plage de Trouville)>(1864)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이것은 그가 서른네 살 때 채 스무 살이 안 된 젊은 모네를 처음 만나 그림을 가르쳐주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모네는 이렇게 말한다.
"부댕 씨는 정성을 다해 내게 그림을 가르쳐주었다. 내 눈이 천천히 뜨였다. 나는 자연이 무엇인가를 이해했다. 그와 동시에 바다에 대해서도 배웠다."
옹플뢰르에는 부댕의 작품은 물론 모네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으젠 부댕 미술관이 있다.
옹플뢰르의 에릭 사티 생가
또 옹플뢰르는 한국에서 한 침대회사의 광고에 삽입되어 널리 알려진 <짐노페디>를 작곡한 음악가 에릭 사티의 고향이며, 그의 생가가 아직 남아 있어 들어가 볼 수 있다.
▯ 에트르타(Étretat)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210킬로 가량 떨어진 노르망디의 해안 도시 에트르타는 원래 한적한 어항이었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명한 해변 리조트로 변했다. 쿠르베나 부댕, 모네 같은 화가들이 "코끼리 바위"라고 불리는 백악 절벽을 화폭에 담아 이 도시를 전 세계에 알렸고, 아르센 뤼팽이 모험을 벌이는 <기암성>을 쓴 모리스 블랑과 <여자의 일생>을 쓴 모파상, 플로베르(<마담 보바리>) 같은 작가들은 이 도시를 하나의 문학적 신화로 만들었다.
에트르타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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