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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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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3), 아케이드, 반 고흐 마을(오베르쉬르우와즈)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몽마르트르 3

☐ 프랑스 가수, 달리다(DALIDA)

달리다는 사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음반만 1억 5천만 장 이상이 팔렸고,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가수 중 한 명이며, 유튜브 클릭 수가 10억 번 이상을 기록했고, 2001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에디트 피아프와 함께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여자가수로 뽑히기도 했다. 원래는 이태리 출신으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나 미스 이집트가 되었고, 원래는 영화 쪽에서 성공하려고 파리로 올라왔으나 음악 쪽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스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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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달리다(DALIDA) 동상


그러나 그녀의 사생활은 너무나 불행해서, 사귀는 남자마다 전부 다 자살했고, 심지어는 여러 번이나 그들의 주검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다. 서른네 살 때는 스물두 살인 대학생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이태리에서 낙태 수술을 잘못 받는 바람에 불임이 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87년 몽마르트르에 있는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팬들에게 “삶을 견딜 수가 없어요. 용서해줘요”라는 유서를 남겼다.


☐ 벽을 뚫고 다니는 남자

몽마르트르 언덕을 느린 걸음으로 오르다가 거의 예외 없이 관광객들이 걸음을 멈춘 채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갈레트 풍차 앞을 지난다. 거기서 20여 미터가량 더 가다가 오른쪽을 바라보면 벽에 박힌 한 남자가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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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뚫고 다니는 남자> 


마르셀 에메의 <벽을 뚫고 다니는 남자> 주인공인 뒤퇴이유다. 오르샹 거리에 사는 이 평범한 인물은 어느 날 자신에게 벽을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능력을 이용하여 권태롭고 초라한 현실과 그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환상을 들락거린다. 그러나 현실과 환상 사이에는 벽 하나 뿐, 결국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비루한 일상이다. 결국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하늘을 날아오르다 날개가 태양에 녹아버린 이카루스처럼 말이다. 마르셀 에메, 그는 몽마르트 뒤편에 있는 생 뱅상 묘지에 마르셀 카르네, 위트릴로와 함께 누워 있다. 인간은 저렇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벽 안에 갇힌 존재다. 



■ 파리의 명소 <아케이드>

위대한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19세기 파리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자 비밀스런 상품의 사원으로 묘사한 아케이드(Passage Couvert. 정확히 번역하자면 지붕이 덮인 통로). "이곳에서 사람들은 번쩍거림에 도취되어 꿈을 꾸듯 자신의 시대를 살아갔다."

닫혀진 이 색다른 세계는 센 강 우안, 그랑 불바르(Grands Boulevards)와 팔레 르와얄, 스트라스부르그-생-드니(Strasbourg-Saint-Denis) 주변의 활기찬 도로 뒤편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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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이드


18세기 말의 파리는 아직 중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길거리는 꾸불꾸불했고, 거기에 깔린 포석은 울퉁불퉁했으며, 인도도 없었고 하수도도 없었다. 가로등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아 밤에는 어두컴컴했다. 그러므로 파리를 산책한다는 건 엄청난 고역이며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차도까지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거리를 걷는다는 건 아예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사제계급과 귀족계급의 소유지를 몰수함으로써 넓은 면적의 부동산 개발이 가능해져 아케이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아케이드 중 하나인 카이르 아케이드는 1799년 수녀원 자리에 세워졌다. 그와 동시에 신흥부자 계급이 출현하고 나폴레옹 전쟁도 끝나 평화로워지면서 상업이 발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중동 국가들의 시장을 모델로 하여 햇빛이 큰 유리창을 통해 직접 쏟아져 들어오게 되어 있는 아케이드의 출현은 이집트 원정 이후 파리에 몰아닥친 동양풍의 유행과 일치한다. 처음에는 아케이드의 골조가 나무로 되어 있었으나 차츰차츰 19세기 초에 크게 유행한 쇠로 바뀌었다. 일부 아케이드들은 지방으로 떠나는 마차들이 모여 있는 정류장 근처에 있어 여행객들을 손님으로 끌어모았다. 이런 아케이드에는 여행자들이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큰 시계가 붙어 있었다.


<신상품>을 파는 가게들 옆에는 카페와 독서실, 문학 살롱, 목욕탕, 화장실까지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아케이드는 19세기 전반 파리 최고의 산책장소가 되었다. 그랑 불바르 주변에 집중되어 있는 연극공연장에서 연극을 보고 나온 사람들은 가스로 난방과 조명을 하는 밝고 따뜻한 아케이드에서 사교활동까지 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오스만(Haussmann)에 의해 큰 기차역들이 세워지고 양쪽에 인도가 설치된 넓은 길들이 여기저기 뚫리면서 150개에 달랬던 아케이드는 사양길을 걷는다. 같은 시기에 백화점까지 생기면서 사람들은 아케이드를 완전히 버려 지금은 20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아케이드가 비비안 아케이드다. 장-폴 골티에르와 유키 토리이 같은 고급 부티크와 아 프리오리 테 같은 찻집, 오래된 고서점, 장난감 가게, 식당 등 다양한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특히 자주 비가 내리는 파리에서는 훌륭한 산책 장소가 된다. 루브르 미술관이나 오페라에서도 멀지 않으므로 한번 들러볼만하다. 


█  오베르쉬르와즈(Auvers-sur-Oise)

파리 북쪽의 오베르쉬르와즈 마을은 와즈 강을 길게 이어져 있다. 화가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마을을 찾아와 그림을 그렸다. 가장 먼저 이 마을에 정착한 화가는 도비니다. 그는 1860년 이 마을을 처음 찾아와 와즈 강가에서 그림을 그렸다. 도비니는 배를 한 척 사서 "르 보탱"이라고 이름 붙인 다음 아틀리에로 개조하여 오즈 강에 띄웠다. 이 "르 보탱"호를 타면 날씨에 상관없이 쉽게 이동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모네도 아르장퇴유에 사는 동안 이렇게 배를 사서 아틀리에로 만들 것이다). 그러고 나서 코로와 모리소 자매, 마네의 친구인 앙투안 귀요맹 같은 화가들이 이 마을을 찾아왔다. 

그러나 오베르쉬르와즈를 전 세계에 알린 것은 누구보다도 반 고흐다.  


□ 빈센트 반 고흐

1890년 봄, 당시 남프랑스 생레미라는 마을의 정신병원에 있던 반 고흐는 파리로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동생 테오를 들들 볶았다. 그러나 얼마 전에 아들(이 아이 역시 반 고흐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을 낳은 테오는 형이 돌아오는 것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었다. 겨울에 두 번이나 발작을 일으키면서 반 고흐의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반 고흐가 파리에서 살 경우 정신적 균형을 잃어버릴까봐 걱정이 된 나머지 그 당시 에라니에 살고 있던 피사로에게 편지를 보내서 형을 좀 데리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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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고흐의 <오베르의 교회>


반 고흐가 피사로네 가정의 가족적이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살면 정신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을 앓고 있는 반 고흐랑 같이 살면 아이들이 나쁜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한 아내가 반대하고 나서자 피사로는 테오의 부탁을 거절했다. 피사로는 대신 가세 의사를 한 번 찾아가보면 어떻겠느냐고 테오에게 제안했다. 이건 좋은 생각이었다. 이미 반 고흐에 대해 알고 있던 가세 의사는 정신병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기꺼이 이 부탁을 받아들였다.                           


반 고흐는 파리에 들러 테오 집에서 지내다가 사흘 뒤인 5월 21일 오베르쉬르와즈로 갔다. 이곳에 도착한 그는 하루 방값이 3프랑 50 상팀인 라부 여관에 자리잡았다. 여관 주인은 꼭 필요한 가구만 갖추어진 지붕밑 방을 그에게 내주었다.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반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머물던 방을 떠올렸다. 가세 박사는 반 고흐가 매우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반면 반 고흐는 가세 박사가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며 그가 자기보다 더 아픈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반 고흐의 행복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 동안 힘들었던 걸 다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종일 그림만 그렸다(두 달 동안 무려 일흔다섯 점의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는 거의 매일 저녁 가세 박사를 찾아갔고, 가세 의사와 그의 딸은 식사를 하고 가라며 그를 붙잡았다. 


그러다가 7월 초,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파리로 테오를 만나러 갔던 그는 몹시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아마 테오는 반 고흐에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고 화랑에서 일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을 것이고,  그는 이 모든 게 자기 탓이라며 자책했을 것이다. 


이때부터 반 고흐는 극도로 예민해져서 툭하면 화를 내는 등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졌다. 그는 화가 귀유맹이 그린 그림의 액자 때문에 가세 의사와 말다툼을 하다 사이가 틀어졌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7월 27일 일요일, 그는 오전에 까마귀 떼가 날아다니는 밀밭을 그리다가 집으로 돌아와 라부 가족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밀밭으로 돌아가 계속 그림을 그렸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자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주섬주섬 화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권총을 꺼내더니 자신의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힘을 내어 라부 여관으로 돌아갔다. 라부 부부는 가슴을 움켜잡은 채 거의 기다시피 계단을 올라가는 반 고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반 고흐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진 라부 씨가 올라가 보니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들릴듯말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는 게 너무 지겨워서 죽으려고 했어요." 


가세 의사가 파리에 가 있었으므로 동네 의사를 불렀다. 빈센트 반 고흐는 끔찍하게 고통스러워하다가 연락을 받고 달려온 테오 그리고 가세 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려고 애쓰는 동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슬픔은 평생동안 지속될 거야.."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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