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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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전의 프티 트리아농 궁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왕궁, 한 해에 천만 명(성과 공원 포함)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왕궁.
베르사유 궁은 파리를 찾아온 사람들이 파리 밖에서 가장 많이 찾는 명소다. 그렇지만 입장객이 많은 만큼 왕의 방과 여왕의 방, 거울의 방이 있는 베르사유 궁은 항상 인파로 붐벼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베르사유 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궁 오른쪽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 그랑 트리아농 궁과 프티 트리아농 궁, 마리-앙투아네트의 농장이 있다.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지는 대운하를 바라보며 호젓한 산책길을 20분 정도 미음완보(微吟緩步)하다 보면 왼쪽 저만치에 그랑 트리아농 궁이 보인다.
그랑 트리아농 궁은 루이 14세가 궁정 건축가인 쥘 아르두앵-망사르를 시켜서 1687년에 짓게 했는데, 외부가 장미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대리석의 트리아농”이라고도 불린다. 앞마당과 궁궐, 정원, 분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둥들이 서 있는 “페리스틸”이라는 이름의 긴 회랑이 두 개의 건물을 연결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오른쪽 건물은 다시 트리아농-수-브와라고 불리는 건물과 이어져 있다.
궁전 북쪽에는 프랑스 식 정원이 펼쳐져 있고, 이 정원에서 왼쪽으로 걸어 나가면 대운하와 연결되어 17세기에는 왕이나 여왕이 베르사유 궁을 내려와 운하 동쪽 끝에서 배를 타고 이 궁전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그랑 트리아농 궁에서는 루이 14세와 러시아의 표도르 1세, 루이 15세의 아내인 마리-레그쟁스카 왕비 등이 살았고, 보다 최근에는 드골 대통령이나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루이 14세가 이 궁전에서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은 1691년 7월부터인데, 그 당시 한창 아우구스부르그 동맹 전쟁을 치르고 있던 탓에 돈이 없어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궁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사치스럽게 장식하지 못했다. 대신 수천 개의 화분을 궁전 안에 놓아두되, 꽃향기가 하루 종일 궁전 안에 배이도록 화분을 하루에 두 번씩 교체했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왕족이나 귀족 등을 이곳으로 불러 저녁식사를 대접하곤 했는데, 궁정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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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티 트리아농 궁
루이 15세는 그랑 트리아농 궁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데다가 정부인 드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하도 성화를 해대자 1749년 그랑 트리아농 궁 동쪽에 식물원(그는 식물학에 관심이 많았다)과 프랑스 정자, 시원한 정자를 새로 짓고 가금류 사육장이 딸린 프랑스 정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다시 1762년에는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네모난 성을 짓도록 한다. 이 성의 준공 테이프는 드 퐁파두르 부인이 아니라 그녀의 뒤를 이은 새로운 정부 뒤 바리 백작부인이 1769년에 끊었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루이 16세는 나이어린 아내 마리-앙투아네트에게 프티 트리아농 궁을 선물했고, 베르사유 궁의 답답하고 번잡한 분위기에 질려 있던 그녀는 이 성을 자신의 내밀한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을 짓고 식물원을 헐어버린 다음 좀 더 자연친화적인 영국식 정원을 조성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건축가 리샤르 믹크는 산책길 여기저기에 전망대와 사랑의 사원, 동굴, 인공바위산 등을 만들었는데, 어린 시절을 알프스 산맥에서 보낸 마리-앙투아네트에게 그때의 추억을 되살려주기 위해서였다.
□ 1층
1. Salle des Gardes(경호원들의 방)
19세기까지 경호 용도로 쓰였다. 이곳에 경호원들의 침대와 침구류를 설치했다.
2. Le Grand Escalier(큰 계단)
윗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인데, 층계난간이 두드려 단단하게 만든 쇠와 금박을 입힌 청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철물공인 프랑수아 브로슈아의 걸작이다. 마리-앙투아네트를 뜻하는 <MA>라는 글자가 보인다. 또 2층 층계참의 벽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3. Salle de Billard(당구실)
원래는 이 방에 루이 15세의 당구대가 있었으나, 마리-앙투아네트가 1784년에 그것을 2층의 작은 식당으로 옮기도록 했다. 지금 놓여 있는 것은 장교들의 당구대다.
4. Salle de l’argenterie(은그릇의 방)
마리-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시누이들이 쓰던 은그릇과 자기, 예배용 금은세공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5. L’Escalier du Roi(왕의 계단)
원래 여기에는 왕의 계단이 있었는데, 윗층으로 이어지는 이 계단은 매우 사적인 용도로 쓰여서 오직 왕만 이용할 수 있었다. 왕은 각층 문마다 열기가 무척 힘든 자물쇠를 채워놓은 다음 열쇠는 자기가 보관했다.
이 계단은 2층에 있었던 Salon de compagnie(놀이를 하고 음악을 감상하는 방)와 왕의 은둔실(나중에 뒤 바리 부인과 마리-앙트아네트의 침실이 된)로 이어졌다. 그리고 2층 층계참에는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계단을 맨 위층까지 올라가면 왕의 방이 있었다. 이 계단은 마리-앙투아네트의 명령에 따라 파괴되었다.
6. Rechauffoir(음식 덥히는 방)
부엌이 멀리 있었으므로 여기까지 음식을 가져온 다음 다시 덥혀 2층의 식당으로 올려갔다. 요리용 화덕과 찬장이 원래 문이 있던 자리에 복원되어 있다.
□ 2층
7. Antichambre(부속실)
원래는 식기실이었던 이 방은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프랑스 정원의 테라스로 곧장 접근할 수 있었다. 여기 걸려 있는 그림은 여류화가인 비제-르브룅이 그린(1784) <장미를 든 마리-앙투아네트>다. 그리고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의 오빠인 조제프 2세의 조각상도 보인다.
부속실에 있는 비제-르브룅의 <장미를 든 마리-앙투와네트>
8. Grande Salle à Manger(큰 식당)
1769년 9월 이 방에서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한 루이 15세는 “날아다니는 식탁”을, 즉 모든 음식이 중이층(1층과 2층 사이의 층)에서 올라오도록 하려 했으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벽에는 이 방에 어울리는 자연의 생산(추수, 낚시, 사냥, 포도 수확)에 관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벽난로 위의 조각은 마리-앙투아네트가 스무 살 때 모습이다.
9. Petite Salle à Manger(작은 식당)
원래는 식당이었으나 마리-앙투아네트가 1784년에 이 방에 당구대를 설치했다. 초상화는 루이 15세의 애인이었던 드 퐁파두르 부인이 “아름다운 정원사”로 변한 그림이고, 카를 반 루라는 화가가 1760년에 그렸다.
동아리 방(Salon de Compagnie)
10. Salon de Compagnie(동아리 방)
놀이를 하고 음악을 감상하는 방인데, 특히 마리-앙투아네트 때 그랬다. 벽의 장식판을 보면 루이 15세를 의미하는 두 개의 L(도금양 잎)이 세 송이의 백합꽃을 둘둘 감고 있다. 세 가지 색깔의 다마스 천은 18세기 왕의 성에 흔히 쓰였다.
11. Chambre à Coucher(여왕의 침실)
원래는 루이 15세가 혼자 묵상을 하는 방이었으나 1772년에 그의 애인이었던 뒤 바리 부인의 침실로 바뀌었고, 다시 마리-앙투아네트의 침실이 되었다. 이 방은 나중에 마리-루이즈와 도를레앙 공작부인이 사용한다. 멀리 사랑의 사원이 보인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Boudoir라고 부른다)은 여왕이 혼자서만 휴식을 취하도록 하기 위한 공간이다.
여왕의 침실 (Chambre à Coucher)
12. 의자 옷장(Garde-Robe à Chaise), 욕실(Salle de Bain)
루이-필리프 왕의 큰 아들의 아내인 도를레앙 공작부인을 위해 마련된 공간. 옷장으로도 쓰였고 욕조로도 쓰였다.
이 농가 마을은 베르사유 궁의 꽉 짜인 생활리듬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어 한 마리-앙투아네트의 요구에 따라 1783년에 조성되었는데, 장-자크 루소가 쓴 글이 큰 영향을 미쳤다.
마을의 건축을 담당한 리샤르 믹크는 잉어와 곤들메기 등의 물고기를 낚을 수 있는 호수를 인공으로 만든 다음 그 주변에 열두 채의 초가건물을 지었는데, 마리-앙투아네트가 먹을 우유와 달걀을 생산하는 농가와 등대 모양의 탑, 비둘기 집, 살롱, 헛간, 물레방앗간, 경비대 건물 등이 있다. 각 건물에는 텃밭과 과수밭, 꽃나무 정원이 곁들여져 있다. 이 마을 한가운데 여왕의 집 두 채가 있으며, 이 두 건물은 긴 테라스로 이어져 있고, 집 앞에는 돌다리도 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5분 가량 걸어가면 양과 거위, 개, 닭 등 가축을 키우는 농가가 있다.
마리-앙투아네트는 이곳에 오면 농부 옷으로 갈아입고 밀짚모자를 쓴 다음 일부러 스위스에서 데려온 송아지와 염소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이 농장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마리-앙투아네트가 초대한 여성들뿐이었는데, 그것은 곧 여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루이 16세가 이곳을 찾는 일은 거의 없어서 마리-앙투아네트는 이따금 반주에 맞춰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이들은 함께 갓 짜낸 우유를 마시거나 금방 딴 과일을 먹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녀가 여기서 전원생활을 만끽하기 시작한 지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 10월 5일 오후 그녀는 그토록 행복했던 시간을 보낸 이 농가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남편 루이 16세와 함께 파리로 끌려갔다가 1793년 10월 16일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진 단두대에 목이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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