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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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전의 그랑 트리아농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랑트리아농 궁의 호위대원 경비실
이어서 17세기와 18세기에 귀족들의 대기실로 쓰였던 방이 나타나는데, 1691년의 장식품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제 1 제정 때는 나폴레옹의 어머니에 이어 마리 루이즈 황후의 수행원들이 식사를 하는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루이 필리프 시대에는 마리 아멜리 황후를 호위하는 호위대원들의 경비실로 바뀌었다.
페리스틸이라고 불리는 긴 회랑을 지나 다른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둥근 방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그냥 여덟 개의 기둥만 서 있어서 “기둥 부속실”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1750년에 루이 15세의 수석건축가인 앙주 작크 가브리엘이 창문 앞 왼쪽에는 보물실을, 오른쪽에는 작은 예배당을 만들었다. 제 1 제정과 루이 필리프 시대에는 경비대실로 사용되었다.
기둥 부속실
그 다음의 방은 루이 14세 때는 제 1 부속실로 쓰이다가 음악실로 바뀌었다. 작은 계단석을 만들어 음악가들이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때 다시 장교들이 모이는 방으로 바뀌었고, 루이 필리프 시대에는 당구실로 사용되었다.
당구실
이번에는 루이 14세 때 두 개의 방(<게임 방>과 <잠자는 방>)을 합쳐 루이 14세의 첫 번째 침실로 만들었던 방을 보게 된다. 나폴레옹 때는 <고급장교의 방>과 <왕족들의 방>으로 쓰다가 1838년에 이 두 개의 방을 합쳐 넓은 응접실을 만든 다음 왕족들이나 초대받은 저명인사들이 모임을 가졌다.
응접실
그 다음 방은 공작석(孔雀石)의 방이라고 불린다. 시베리아의 우랄산맥에서 나는 공작석은 보석을 만드는 데 쓰이는 저 초록색 돌을 말한다. 원래는 부르고뉴 공작부인(루이 14세 손자의 아내. 루이 15세의 어머니)이 살던 방이었다가 황제의 응접실로 바뀌었는데, 저 초록색 돌로 만든 단지나 촛대, 수반 때문에 공작석의 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1세는 틸지트 협정을 맺고 그에 대한 일종의 담보물로 1807년에 이것들을 나폴레옹에게 보냈다. 원래는 튈러리 궁의 황제 대업무실에 놓여 있었으나 너무 좁다고 판단되어 1811년에 여기로 옮겨졌다.
궁정에서도 그렇지만 이 방에서도 아무 자리에나 막 앉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황제와 황후는 소파에 편안하게 앉았고, 왕족들은 안락의자에 앉았으며, 초대받은 손님들은 의자에 앉았고, 군인들은 불편한 접이식의자에 앉았다고 전해진다.
공작석의
방
그 다음에 보게 되는 황제의 서재는 1713년에 만들어져 처음에는 근처에 개울로 이루어진 미로가 있는 작은 숲이 있어서 “샘의 방”이라고 불렸다가 루이 15세의 두 번째 애인인 맹트농 부인의 방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때는 황제의 서재로 쓰였는데, 그는 특히 이 방에서 일하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벽난로 왼쪽에 난 문을 통해 그의 방으로 직접 연결되어 있다.
황제의
서재
“시원한 방”이라고 불리는 그 다음 방은 북쪽에 면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이 방은 방금 얘기한 루이 15세의 어머니 부르고뉴 공작부인의 집무실로 사용되다가 나폴레옹 때 국무회의실로 사용되었는데, 나폴레옹이 가구를 직접 골랐다고 한다.
1830년 7월에 혁명이 일어나 왕정복고시대가 끝나고 루이 필리프의 군주정치가 시작되었다. 왕정복고시대의 왕인 샤를 10세는 바로 이 방에서 각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벽난로 위에 있는 그림 <제피로스(서풍의 신)와 플로라(농업의 여신)>(이 두 인물을 그린 그림은 트리아농 궁에 여러 점이 있다)은 장 주브네(1644-1717)가 그렸고, <루브르 전경> 그림 네 점은 장-바티스트 마르탱(1669-1735)이 그렸다.
시원한
방
길이는 52미터, 폭은 7미터에 달하는 코텔의 방이 이어서 나타나는데, 이 방 안에 있는 그림 스물네 점 중 스물한 점을 화가인 장 코텔이 그려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이 방은 원래 겨울에 화단의 꽃이 심겨진 화분들을 들여놓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들은 베르사유궁과 트리아농궁의 숲을 그린 것들인데, 그것들 중 많은 수가 사라졌다. 말하자면 저 그림들은 루이 14세 때 정원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인 것이다. 나폴레옹과 루이 필리프 때는 배의 모형이나 예술품을 진열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코텔의 방
이 방은 또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헝가리의 운명을 결정지은(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분리함) 트리아농 조약이 맺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 방이 끝나는 곳에 있는 정원의 방은 원래는 푸른색과 흰색 자기그릇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자기 트리아농의 향기의 방이라고 불렸다. 1689년에 루이 14세는 타이 대사들을 이 방으로 데려가곤 했고, 그들은 깜짝 놀라며 너무나 기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향기가 너무 좋았고 꽃으로 향기롭게 하는 방법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지중해변의 도시 툴롱에 있었던 왕의 정원에서는 향기가 무척 강한 월하향(月下香)이라는 꽃을 1683년부터 재배하여 매년 엄청나게 트리아농 궁에 보냈다. 벨렝종이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트리아농 궁에 어떤 꽃들을 심었는지 알 수 있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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