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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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 첫번째-1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베르사이유 궁의 역사'는 지난 주에서 이어짐
(...)1715년 루이 14세가 죽었을 때 루이 15세가 다섯 살이었으므로 필리프 도를레앙이 7년간 파리에서 섭정을 했고, 이 동안 프랑스 궁정은 베르사유 궁을 떠나 있었다. 베르사유 궁으로 돌아온 루이 15세는 북쪽 건물에 오페라 극장을 지은 것 말고는 궁에 손질을 하지 않았고, 증조할아버지가 하던 의식도 그대로 따라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편일률적인 공식생활에 점점 더 싫증을 내면서 베르사유궁 내에서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가족들이나 친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더 자주 갖는 한편 슈아시나 라뮈에트 등 다른 성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베르사유 근처의 그랑 트리아농 궁에 점점 더 자주 머물렀고, 근처에 프랑스식 정원을 조성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식물 채집에 몰두했다. 또 애인이었던 퐁파두르 부인의 권유에 따라 프티 트리아농궁도 지었다. 하지만 이 궁이 완공되었을 때는 그녀가 죽어서 또 다른 첩인 뒤 바리 부인이 완공 테이프를 끊었다.
물론 왕족들의 결혼식(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1770년 왕의 예배당에서 거행된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다)이 거행될 때는 베르사유 궁이 잠시 활기를 띠었지만, 왕이 공식적인 종교행사에 잘 참여하지 않으면서 프랑스 왕은 더 이상 신성시되지 않았다. 게다가 7년 전쟁에서도 패하고 왕의 암살이 기도되는 등 악재가 겹치자 귀족들은 베르사유를 버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베르사이유 궁
결국 루이 15세는 1774년에 죽고 그 뒤를 손자 루이 16세가 이어받았다. 루이 16세는 전임 왕과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이번에는 마리-앙투아네트가 문제였다. 시대에 뒤떨어진 의식과 에티켓이 여왕을 짜증나게 만든 것이다. 자연적인 것을 추구하는 시대에 마치 기계처럼 돌아가는 궁정생활은 그녀의 눈에 혐오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에티켓을 단순화하고, 내실로 친한 친구들만 불러들이며, 프티 트리아농 궁과 마리-앙투아네트의 농가에서 점차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소심한 성격의 루이 16세도 공식적인 의전을 안 좋아해서 귀족들은 화요일과 일요일에만 베르사유 궁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면서 베르사유 궁은 현실세계에 등을 돌린 인위적 세계가 되어 사실이든 아니든 수많은 비난과 스캔들에 시달려야 했다. 위대한 프랑스 왕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개인처럼 행동하는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를 위해 그 엄청난 돈을 쓰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라고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운명의 1789년 10월, 파리 시민들은 루이 16세와 마리-앙투아네트를 창과 총검으로 위협하며 파리로 끌고 갔다. 그렇지만 베르사유 궁은 약탈당하거나 파괴되거나 불타지 않고 왕관이라거나 백합꽃, 숫자 등 왕권을 상징하는 것만 제거되고 가구는 공매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혁명정부는 텅 빈 베르사유 궁을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했다.
나폴레옹은 트리아농궁에 잠시 살았고, 왕정을 복고시킨 부르봉 왕가는 베르사유궁에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 뒤에 프랑스를 다스린 루이 필리프 왕은 이 궁전을 보존하고 싶어서 프랑스 역사박물관으로 변모시켰다.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는 1871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했고, 1919년에는 같은 장소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되기도 했다.
베르사유궁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탁발승과 창녀, 천연두에 걸린 사람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궁에 들어가서 모든 방을 다 구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왕의 방에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왕이 그 시간에 왕의 방에 없기만 하면 말이다.
그러니까 베르사유궁은 낮에는 궁에서 사는 사람들과 호기심 많은 사람들, 사업 관계로 뭘 부탁하러 온 사람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 심지어는 외국에서 찾아온 사람까지 뒤섞여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리러 가는 루이 14세의 행차도 구경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단연 왕의 방이었다.
사람들은 호위대장의 허락만 받으면 왕에게 다가가 청원을 글로 써서 보여주거나 구두로 할 수 있었다. 아니면 왕의 부속실에 청원서를 제출할 수도 있었다. 루이 14세는 청원서에 보름 내에 답변하도록 관리들에게 지시했다.
사람들이 언제 어느 때라도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왕은 네 명의 호위대원들에게 둘러싸여 이동했다. 호위대는 스코틀랜드 부대와 스위스 친위대 등 4개 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궁 헌병대는 궁의 치안 업무를 맡았고, 그랜드 아파트먼트와 공원 출입문의 감시 업무는 스위스 부대가 맡았다. 왕의 문에서는 문 경비대가 보초를 섰고, 앞마당 문은 프랑스 경비대와 스위스 경비대가 지켰다.
베르사이유 궁에 있는 루이 14세 기마상
프롱드 난의 기억이 깊이 배여 있던 루이 14세는 친인척과 귀족들을 계속하여 감시했다. 하인들과 시종들, 호위대원들로 이루어진 첩자 조직을 가동하여 모든 정보를 접했던 것이다. 또 신하들에게 총애를 베풀었다가 거두어들이는 일을 되풀이함으로써 그들이 경쟁을 벌이는 데 몰두하게 해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아예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궁정 사람들은 왕으로부터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나, 저 사람 누군지 몰라!”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왕 앞에 수시로 모습을 나타내야만 했다.
예를 들어 라로슈푸코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왕실의 수렵 담당관이자 의상 담당관이었는데, 이건 아주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는 왕이 있는 곳에는 늘 자리를 함께 했다. 그는 잠에서 깨기 의식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고, 잠자리에 들기 의식에도 빠지는 법이 없었으며, 왕이 옷을 갈아입을 때도 반드시 자리를 함께 해서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므로 궁정에서는 존재와 외관, 꾸밈과 숨김의 놀이를 잘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루이 14세 때 훌륭한 궁정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이 필요했을까? 우선은 에티켓의 엄격함을 이겨내기 위해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고, 궁정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재빨리 파악하기 위해 머리도 뛰어나야 했으며, 건강도 좋아야 했고, 돈도 좀 있어야 했다.
루이 14세는 흔히 절대주의와 동일시된다.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왕이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행사한 것은 맞지만, 그 권한은 관습법이라든가 교회 권력, 각종 계급이나 집단으로 이루어진 사회, 여러 단체의 특권의 의해 크게 제한되었다.
왕은 혼자 통치하지 않았다. 중요한 결정은 국정회의에서 내려졌는데, 이 국정회의는 자문 역할만 했지만 왕은 대부분 여기서 내려진 결정을 따랐다. 국정회의는 여러 분과로 나누어지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급회의”로서 3명에서 7명의 장관으로 이루어진 이 회의는 주로 대외정책을 다루었다. 회의는 1주일에 여러 차례 열렸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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