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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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 첫번째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베르사유궁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다. 회화와 조각, 건축, 실내장식, 가구, 정원 등으로 이루어지는 이 예술품은 오직 절대군주 루이 14세에게만 봉사하였다.
-루이 14세는 누구인가?
루이 14세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베르사유궁을 세우고 문화 예술을 후원하고 꽃피웠으며, 또 한편으로는 수많은 전쟁을 벌이고 낭트칙령을 폐지했으며 신교도들을 박해해서 지금까지도 찬탄과 혐오를 동시에 받고 있다.
1638년생인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 루이 13세가 죽어 왕이 되었으며,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 안느 드트리슈의 섭정을 받는 한편 대부인 마자랭 총리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열 살 때 파리 의회와 귀족들이 일으킨 프롱드의 난에 5년 동안 시달리고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질서를 잡아야 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베르사이유 궁 정원 전경
1661년 성인이 되어 왕권을 행사하게 된 그는 모든 인간이 다 그렇듯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상당히 거칠고 비열한 반면 또 한편으로는 정중하고 세심한 면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연출하여 우상처럼 숭배 받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말년에는 이 같은 성향도 약화되어 비밀 결혼식을 올린 맹트농 부인과 함께 좀 더 안쪽에 있는 방에서 지내게 된다.
루이 14세는 놀라운 기억력과 뛰어난 판단력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또 어린 시절에 겪었던 프롱드 난의 기억으로 인해 소심하고 다른 사람을 잘 믿지 못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한 자제력을 갖추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위엄 있는 프랑스 왕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세와 제스처를 세심하게 연구했다고 한다.
그는 키가 1미터 80, 매부리코, 마마자국이 살짝 나 있는 얼굴의 소유자이고, 서른이 넘었을 때 대머리가 되어 가발을 썼다.
-베르사유 궁의 역사
베르사유 궁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35킬로 가량 떨어진 도시 베르사유에 있는 궁전이며, 베르사유는 "땅"이라는 뜻이다. 루이 14세와 15세, 16세, 세 명의 왕이 1682년에서 1789년까지 이 궁전에 살며 프랑스를 다스렸다.
그런데 프랑스의 왕들은 왜 파리가 아닌 베르사유에 살게 된 것일까? 그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왕들은 루브르궁과 파리 주변, 루아르 강 주변의 성들을 돌아다니며 사는 떠돌이 신세였다. 그런데 1638년생인 루이 14세가 열 살 때인 1648년에 프롱드의 반란이 일어난다. 5년 동안 계속된 이 반란은 귀족들과 파리 시민들이 왕권에 저항하여 일으켰는데, 루이 14세는 어린 나이에 두 번이나 이 반란을 피해 파리 밖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이때 루이 14세는 파리 시민들에 대한 두려움과 이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을 장악해야 될 필요성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반란이 진압되어 파리로 돌아온 루이 14세는, 14세기 샤를 5세 때부터 왕궁으로 쓰였으나 사실상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던 루브르궁의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사는 지지부진하여 여전히 퐁텐블로와 생제르맹앙레 등지를 옮겨 다녀야만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베르사유 궁은 사냥을 좋아했던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사냥을 마치고 잠시 쉬던 사냥 쉼터 수준이었다.
1665년, 당시 수상이었던 콜베르는 루브르 궁 공사를 완공시켜 여기 자리 잡도록 루이 14세를 설득하지만, 그는 위대한 프랑스 왕이라는 자신의 지위에도 어울리고 큰 규모의 파티도 열 수 있는 더 웅장한 궁전을 가지고 싶어 하였다. 그리하여 베르사유에 궁궐을 짓기로 결정하고, 그 당시에 가장 유명한 르 보라는 사람을 건축가로 선정하였다.
루이 14세는 아직은 시골이나 다름없었던 이곳으로 궁정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궁 주변의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는가 하면 여러 가지 특권을 제공했고, 귀족들도 루이 14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궁 주변에 대저택을 지었다.
1677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궁을 프랑스 왕의 주요 관저로 정하고, 그 다음 해에는 쥘 아르두앙 망사르라는 건축가에게 궁궐의 대규모 개축을 지시한다. 이 두 번째 베르사유 건축 공사에서 망사르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하여 성의 모습을 더 웅장하게 뒤바꿔놓았다. 또 르노트르라는 정원 설계사는 자연을 완전히 개조하여 드넓은 정원을 만들었고, 르브룅이라는 왕의 수석화가는 궁궐의 실내장식을 담당하여 여러 가지 색깔이 배합된 대리석과 천장화들로 궁 내부를 아름답고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1682년, 드디어 프랑스 궁정이 베르사유 궁에 자리 잡는다. 루이 14세가 44세 때의 일이다.
1682년은 루이 14세의 통치 중반기에 해당한다. 여왕인 마리-루이즈가 이 해에 죽고, 수상인 콜베르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며, 거울의 방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궁궐의 북쪽 부분에 있는 건물은 1689년에야 완공되고, 그랑 트리아농궁의 실내장식은 그 다음 해가 되어서야 끝난다. 또 왕의 방은 1701년에야, 왕의 예배당은 1710년에야 만들어진다.
루이 14세 초상화
대외적으로는 1678년에 니메그 조약이 맺어져 6년을 끌어온 네덜란드 전쟁이 끝나나 싶었지만, 다시 1688년에 아우구스부르그 연맹 전쟁이 일어나 9년 동안 네덜란드와 스페인, 이태리 등과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 사이에도 공사는 계속되지만, 전반적으로 건설에 대한 열기는 줄어들고 루이 14세의 호사 취미도 시들해진다. 게다가 1701년에 일어난 에스파냐 계승전쟁이 무려 13년 뒤인 1714년이 되어서 끝나는 바람에 루이 14세 통치 초기 화려한 파티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물론 1697년에 루이 14세의 손자인 루이 드 프랑스(이 사람의 막내아들이 나중에 루이 15세가 된다)가 젊고 쾌활한 마리-아들레이드 드 사부아와 결혼하면서 궁정은 다시 활기를 찾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보다는 마를리 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고, 황태자 큰아들과 루이 드 프랑스, 그의 아내 등 왕족들이 연이어 죽는 바람에 베르사유 궁의 분위기는 우울해져 갔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 베르사이유 궁의 역사는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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