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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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주리 미술관 두번째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 발터-폴 귀욤 컬렉션
오랑주리 미술관 지하층에 전시되어 있는 "장 발터-폴 귀욤 컬렉션"은 유럽의 회화작품 컬렉션 중에서 가장 화려하다. 이 컬렉션은186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의 작품 140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들의 수집은 혜안을 가진 젊은 화상 폴 귀욤에 의해 시작되고 그의 사후, 유명한 건축가이자 사업가인 장 발터와 재혼한 폴 귀욤의 미망인, 도미니카에 의해 계속되었다.
맹장염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폴 귀욤(1891-1934)은 인상파에서 현대미술에 이르는 수백 점의 작품을 모았는데, 특히 그는 아프리카 미술품을 처음으로 널리 알림으로써 20세기의 예술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모딜리아니 <폴 귀욤 초상화>
젊었을 때 몽마르트르에 있는 한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던 폴 기욤은 1911년에 타이어를 만드는 데 쓰이는 고무 화물 속에 섞여 있던 가봉의 작은 상(像)들을 전시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아프리카 원시미술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던 귀욤 아폴리네르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 <레 스와레 드 파리>라는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아폴리네르는 그를 자신의 예술가 그룹에 끌어들였다.
폴 귀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아폴리네르의 중개인이 된 그는 1914년 아프리카 흑인들이 조각한 예술품 열여덟 점을 뉴욕으로 보내 최초의 흑인예술 전시회인 <나무 조각상들, 현대예술의 뿌리전>을 열었다. 또 1914년부터는 비유콜롱비에 극장에서 조르조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작품을 전시하여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 이후로 아마데오 모딜리아니와 카임 수틴, 드랭, 피카소, 마티스, 반 동겐 등 인상파, 후기인상파, 신인상파, 그리고 20세기 초반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여 파리의 미로메닐 거리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에 전시하였다.
앙드레 드랭 <폴 귀욤 부인의 초상화>
1920년 그는 야심에 가득 찬 아름다운 여성 쥘리에트 라카즈(1898-1977)와 결혼하여 그녀에게 도메니카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었고, 미국의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인 앨버트 반즈의 조언자이자 화상이 되었다.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로 유명해지고 부유해진 그는 미술관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고 난 뒤 건축가 장 발터와 재혼한 도메니카는 폴 귀욤이 수집한 작품들의 숫자를 줄이는 한편 구성도 바꾸었다. 즉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들을 팔고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대거 사들인 것이다. 지금은 국가에 기증된 이 컬렉션은 인상파 화가들의 경우 르누아르와 세잔, 고갱, 모네, 시슬리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이후의 시기에 활동한 작가들의 경우 피카소의 작품 12점, 마티스의 작품 10점, 모딜리아니의 작품 5점, 마리 로랑생의 작품 5점, 두아니에 루소의 작품 9점, 드렝의 작품 29점, 유트릴로의 작품 10점, 수틴의 작품 22점, 반 동겐의 작품 1점을 포함하고 있다.
카임 수틴
카임 수틴(Chaïm Soutine, 1893-1943). 리투아니아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그림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그러다가 인간이나 동물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유대교의 전통을 어기고 어떤 남자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가 이 남자의 아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그 맷값을 받아 그림을 배우게 된다.
그는 화가가 되려고 온 파리에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여러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그림공부를 하기 위해 고향에서 같이 온 친구에게 발견되곤 했다. 그는 열 살 많은 화가 모딜리아니를 멘토로 삼았다. 그러나 그토록 의지했던 모딜리아니가 1920년에 죽자 절망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채 술만 마시는 바람에 지병인 위궤양이 점점 더 악화된다.
카임 수틴 <가죽을 벗긴 소>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미국의 수집가 앨버트 반즈가 우연히 그의 그림을 보고 60여 점을 사들이면서 그는 경제적 여유도 생기고 화가로서의 명성도 얻게 된다. 1927년에는 그의 첫 개인전이 열렸으나, 이런 종류의 행사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아예 개막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인 그는 계속 쫓겨다니게 되고, 그 바람에 지병인 위궤양이 악화되었으나 제때 손을 쓰지 못하는 바람에 1943년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피카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다.
<소와 송아지 머리(Bœuf et tête de veau)>, 1925년, 92 x 75 cm.
수틴은 1920년에서 1925년 사이에 가죽을 벗긴 동물(소, 닭, 칠면조, 꿩, 오리, 토끼 등)이라는 소재에 매혹되어 있었다. 1922년에서 1924년 사이에는 프랑스 정물화가 샤르뎅(1699-1779)의 영향을 받아 토끼와 홍어를 소재로 여러 점의 작품을 그렸다. 또 1920년부터 1925년까지는 가죽을 벗긴 송아지나 양의 고기덩어리를 자주 그렸으며,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소와 송아지 머리>(1925년)도 그중 하나다. 같은 해에는 렘브란트(1606-1669)의 <가죽을 벗긴 소(Le Bœuf écorché)>(94 x 69cm, 루브르 미술관)의 영향을 받아 같은 제목의 훨씬 더 큰 작품(202 x 114cm, 그르노블 미술관)를 그리기도 했다.
카임 수틴 <소와 송아지 머리>
이 당시 그의 아틀리에는 몽파르나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가죽을 벗긴 동물들을 가져다놓고 직접 보면서 그렸다. 그가 이 소재에 이끌린 것은 어린 시절 그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기억 때문이다. "한 번은 정육점 주인이 거위의 목을 자르고 피를 빼내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고함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 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가죽 벗긴 소를 그릴 때 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가죽을 벗긴 소의 몸뚱이가 그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옆에는 송아지 머리가 갈고리에 매달려 있다. 피로 뒤덮인 노란색과 붉은색 살덩어리가 어두운 단일색조의 배경 위에 부각되어 있어서 눈에 한층 더 잘 띤다.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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