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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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미술관 첫번째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12세기 말 파리는 영국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이에 프랑스 왕 필리프 오귀스트는 센강 북쪽에 파리를 방어할 성을 지었다. 이것이 루브르의 시초다. 이 최초의 성에 왕이 살지는 않았다. 이 성은 수비대 숙소와 무기고로만 쓰였다.
1360년 새로 프랑스 왕이 된 샤를 5세는 이 성을 개축하여 왕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루브르성이 화려하게 장식된 밝은 루 브르궁으로 바뀌었다. 그의 뒤를 이어받은 샤를 6세가 죽자 파리는 영국군에게 점령되었다. 그 이후 100년 동안 루브르궁에는 왕이 살지 않게 될 것이다.
1526년, 프랑수아 1세는 루브르궁에 완전히 자리 잡고 중세 루브르성의 서쪽 날개 건물 자리에 새로운 날개 건물을 짓기 시작한다. 앙리 2세는 새로운 남쪽 날개 건물을 건설하라고 지시하고, 서쪽과 남쪽 날개 건물이 만나는 지점에 왕의 별관을 마련한다.
1564년, 앙리 2세의 미망인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서쪽에 튈르리궁을 지을 것을 명하고, 그 후 앙리 4세는 센강을 따라 루브르성과 튈르리궁을 연결하는 그랑드 갈르리(Grande Galerie)를 짓도록 한다.
1643년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는 불타버린 왕의 별관 자리에 아폴론관을 건설하기로 한다. 장차 쿠르 카레(루브르 궁전의 주요 안뜰 중 하나)가 될 건물의 동쪽과 북 쪽 날개 건물을 짓기 시작하는데 도시 쪽으로 나 있는 동쪽 날개 건물의 정면 공사를 클로드 페로에게 맡긴다. 그러나 1682년 루이 14세는 루브르궁을 떠나 베 르사유궁으로 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 3세는 쿠르 카레와 튈르리궁을 북쪽에서 연결하는 나폴레옹관을 완성한다. 1871년 일어난 파리코뮌 당시 튈르리궁은 코뮌군에 의해 불타버린다.
루브르 미술관을 상징하는 피라미드는 1984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의뢰를 받은 중국계 미국인 I. M. 페이가 설계했고, 1988년 완성되어 준공식이 열렸으며 일반인들에게는 1989년 공개되었다.
루브르궁이 루브르 미술관이 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인 1793년의 일이다. 2019년 기준, 이 미술관은 50만 점 이상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 사모트라키의 승리의 여신〉, 〈함무라비 법전〉 등 3만 6천 점 가량을 전시하고 있다.
1.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노인과 아이의 초상 Portrait d’un vieillard et d’un jeune garçon〉, 1490년경, 62.7×46.3cm, 드농관 2층 그랑드 갈르리 710번 전시실 167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노인과 아이의 초상〉
이 작품이 그려진 이탈리아 콰트로첸토 시대를 살았던 사람처럼, 루브르 미술관에서 친구 로랑 도데와 함께 이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기 작품에 그려진 인물 들을 자기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잃어 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 샤를 스완처럼. 나도 매우 사실적인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저 노인이 되어 그 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희끗희끗한 머리칼, 깊게 팬 주름, 보기 흉하게 일 그러진 코…. 세월의 풍파가 그대로 새겨진 저 얼굴은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노인의 한없이 너그러운 눈길을 보라. 그리고 노인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애정 어린 시선을 보라. 적잖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조금씩 따뜻해진다.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세대 간 갈등도 이렇게 봄눈 녹듯 풀리기를.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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