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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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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네번째


본지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7. 폴 세잔(Paul Cèzanne,1839-1906), <수프그릇이 있는 정물>, 1877, 65 x81.5cm, ; 

<사과와 오렌지>, 1899년경, 74 x 93cm, 5, 36번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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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수프그릇이 있는 정물>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이 두 점의 작품을 통해 폴 세잔(1839-1906)의 스타일 변화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세잔은 퐁투아즈에 있는 피사로의 집에서 <수프그릇이 있는 정물>을 그렸다. 여기서 오브제들의 배치는 전통적이다. 그것은 플랑드르 화파가 그린 정물화의 도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세잔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가장 단순한 오브제들을 등장시켜 형태를 단순화하면서 절대적인 기하학적 순수함에 접근한다. 이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그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데생이 아니라 색에 의해 공간적 심도를 표현한다. 그는 과일과 오브제들의 밝은 톤을 배경의 중성적인 톤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어 교대하고 대립시킨다. 세잔의 사과는 결코 식사를 할 때처럼 배치되지 않는다. 이 과일을 자르거나 깎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배열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조직화되지 않은 세계를 환기한다. 자연적인 것과 인간생활 사이에 매달려 있는 이 오브제는 오직 보기 위해 존재한다.

 사과를 선택한 것은 중립적이지도 않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사과는 마네의 굴이나 아스파라가스 같이 즐거움을 주는 오브제도 아니고 반 고흐의 감자나 구두 같은 노동의 오브제도 아니다. 쿠르베는 그의 사과를 자연에서 따낸 반면 세잔은 자신이 자신의 사과와 친화한다고 느낀다. 꺼칠하고 주름진 식탁보에 놓여 있는 이 단단하고 치밀한 오브제는 그와 공통점이 있다. 1895년경, 그는 비평가 조프레이에게 자기는 사과로 파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내성적인 인물에게 정물은 축소되어 테이블 위에 고립된 세계 같다. 그는 눈으로 사과를 쓰다듬으며, 마치 그것이 인간의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과의 둥근 형태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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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사과와 오렌지> 20여년 전에 그려진 <수프그릇이 있는 정물>과 확연히 다르다. 전경과 후경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공간배열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근법도 적용되지 않아서 과일을 담은 접시와 그림 한가운데 놓인 사과는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다. 이 작품의 구성은 일종의 무질서를, 나아가서는  붕괴를 생각나게 한다. 구성은 불안정하고 혼란스럽다. 축이 아래로 향하는데다 시점이 여러 개이고 중첩되어 있어서 눈이 혼란스럽다. 무질서하게 배치된 장식융단과 식탁보, 모포는 이 같은 구성의 불안정한 특징을 한층 더 강화한다.

  말기 작품에서 세잔은 이같은 현실의 단순화 과정을 극단으로 밀고 간다. 1904년에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세잔은 이렇게 썼다.

  “자연을 원기둥 모양과 구형, 원추형으로 그려야 할 것 같아요.

 그리하여 그는 현대예술의 선구자로, 20세기에 일어난 많은 예술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은 작가로 여겨질 것이다.

 

  8. 귀스타브 카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1848-1894), <마루를 대패질하는 사람들>, 1875, 102 x146.5 cm, 5.

 

  1875년에 귀스타브 카이유보트가 그린 <마루를 대패질하는 사람들>은 발표되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주제를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리고 통속적으로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이 충격을 준 것은 또한 그것이 프랑스 회화사에서 완전히 혁신적인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화가는 단 한 번도 그려지지 않은 장면을 그리기로 한다. 쿠르베는 1849년 돌깨는 사람들을 그렸고, 밀레는 1857년 들일하는 여성들을 그렸다. 따라서 들일하는 노동자들은 19세기의 회화예술에서 이미 그 모습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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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카이유보트 <마루를 대패질하는 사람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에 새로 출현한 계급인 도시 프롤레타리아는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물론 1839년에 탄생한 사진은 이 계급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화는 아니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기 집 아파트에서 마루를 깎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카이유보트가 그 모습을 사진과 매우 흡사한(역광이라든가 부감 효과를 보라) 그림으로 그려 영원히 남기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우선 그는 웃통을 벗고 땀을 흘리며 일하는 남성들을 보여주는데, 그 당시만 해도 이것은 벌거벗은 여성들을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었다. 어느 미술관을 가도 날씬한 여성의 알몸을 그린 작품을 볼 수 있었다. 1863년에 그려진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보라. 여자들은 알몸이거나 옷을 거의 벗고 있는 반면 남자들은 전부 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 이번에는 남성들이 웃통을 벗어부쳤다. 이 세 남성은 파리에 있는 한 넓은 아파트에서 등에 빛을 받으며 마루바닥을 평평하게 깎고 있는 중이다. 관람객의 시점이 그림 위쪽(창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 노동자들은 그의 눈 아래 위치하게 된다. 어쩌면 카이유보트는 이처럼 비관습적인 회화적 장치를 통해 이 노동자들이 받는 억압의 무게를 표현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카이유보트는 또한 수집가이기도 해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네와 피사로, 시슬리, 르누아르, 드가, 세잔의 작품을 사들였다. 그가 수집한 이 작품들은 1894년 그가 죽고 난 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었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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