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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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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 라세즈 묘지

본지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6. 모딜리아니(1884-1920)

 얼굴이 길게 늘어난 인물화, 특히 누드화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화가 모딜리아니. 그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이태리에서 태어나 파리의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에서 활동했던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평생 동안 힘들어했다. 그러다가1917년에 당시 열여덟 살이던 미대생 잔 에뷔테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딸이 태어났다. 이 딸은 나중에 아버지의 전기를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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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 <앉아 있는 잔 에뷔테른>, 1918 
92 x 60 cm, 쥐리히 미술관


그는 결국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1920년에 잔 에뷔테른의 팔을 꼭 움켜쥔 채 세상을 떠난다. 잔 에뷔테른은 부모 집으로 끌려갔으나 모딜리아니가 죽고 난 이틀 뒤에 부모 집의 6층 창문에서 몸을 날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배속에는9개월 된 아이가 있었다. 그의 누드 작품들은 1917년 파리에서 공개되자 음모를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전시회장으로 몰려들었고, 경찰은 전시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누워 있는 나부>(1918)는 지난 201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972억 원에 낙찰되었다.

 

 7. 으젠 들라크루아(1798-1863)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사라두나팔루스의 죽음> 등의 걸작으로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를 이끌어간 화가 으젠 들라크루아. 그는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나를 페르라세즈 묘지 높은 곳의 조금 외진 장소에 묻어 달라. 내 무덤에는 무슨 엠블렘도 설치하지 말고 흉상이나 동상도 세우지 말라. 내 무덤은 고대인의 무덤을 그대로 본 따 만들어 달라.   들라크루아의 유언에 따라 로마 장군 스키피오의 무덤을 모방해 볼빅 산 용암으로 만든 그의 무덤은 아무 장식도 없이 소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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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젠 들라크루아의 무덤

 

 8. 제라르 드 네르발(1808-1855)

 무척이나 추웠던 1885 125일 밤, 셔츠 두 벌과 조끼 두 벌에 검은 색 양복을 걸친 다음 니스 칠을 한 구두를 신고 실크해트를 쓴 네르발은 함께 살던 숙모에게 "오늘 밤에는 저 기다리지 말고 그냥 혼자 식사하세요. 오늘 밤은 하얗고 차가울 거예요"라고 말한 다음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지금의 파리 샤틀레 광장 사라-베른아르트 극장 뒤편에 있었던 비에이으-랑테른 거리 4번지 한 구멍가게의 쇠창살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선구자는 이제 으젠 들라크루아와 오노레 발자크, 샤를 노디에에게 둘러싸여 안식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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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라르 드 네르발의 무덤 

  그는 1841년부터 여러 번이나 정신착란을 일으켜 블랑슈 의사의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이 의사는 글을 써서 그의 감정을 배출하라고 권유했다. <불의 딸>  <오렐리아> 같은 걸작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무덤의 어둠 속, 나를 위로하는 그대여 파우칠레페와 이태리의 바다를 내게 돌려주오…" (<몽상>, 1854)

 

 9. 제르다 타로(1910-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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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다 타로의 무덤

 1933년부터 반 나치좌파그룹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제르다 타로는 유인물을 나눠주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같은 해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파리에 정착한 그녀는 헝가리 출신 사진작가 엔드르 에르노프리드만을 만나 1935년부터 연인이 되었고, 그에게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프레스 카드를 받은 두 사람은 스페인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국제여단의 전투를 쫓아다니며 취재하다가 1937 7월 마드리드 근처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 당시 탱크에 깔려 사망하였다. 그녀는 취재 중 사망한 최초의 여성 사진기자다. 페르라세즈 묘지에서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된 그녀의 장례식은 반()파시즘 시위로 변했다. 파블로 네루다와 루이 아라공이 조사를 읊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아라공의 부탁을 받아 그녀의 묘석을 설계했다. 묘석 앞에 앉아 있는 새는 이집트 신화에서 빛과 부활을 상징하는 호루스 독수리다. 그녀의 무덤은 1942 나치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그녀의 사진들은2007년 많은 필름이 뒤늦게 발견되면서 새로이 평가받고 있다.


 10. 사데크 헤다야트(1903-1951)

 다음은 그의 대표작인 <눈먼 올빼미>의 한국어 번역본 (연금술사 출판사)에 실린 사데크 헤디야트 소개다.

  파리에서의 두 번의 자살시도 끝에 마침내 이상하고 낯선 삶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이란 현대문학의 거장 사데크 헤다야트. 카프카에 버금가는 이 천재작가는 테헤란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국비 장학생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했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문학에 몰두했다. 파리에서 쓰기 시작해 7년 만에 완성한 『눈먼 올빼미』는 천 년 넘게 운문만 존재해 온 페르시아 문학에 큰 파문을 던진 최초의 소설이며 최고의 문제작이다.

 고독한 필통 뚜껑 장식사가 벽에 비친 올빼미 모양의 자신의 그림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속물들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고뇌와 풍자, 혐오와 절망이 가득하다. 그리고 방의 환기구를 통해 우연히 보게 된 여인의 등장. 어떤 소설과도 다른 독특한 상상력과 눈부신 묘사, 생의 어둠에 대한 초현실적이고 광기 어린 문체가 빛을 발한다. 어둡고 슬프지만 감동적이다. 20여 개 국에서 출간되었으나 ‘읽으면 자살하게 된다’는 우려 때문에 한때 독서가 금지되었던 작품이다.

 ‘삶에는 서서히 고독한 혼을 갉아먹는 궤양 같은 오래된 상처가 있다.’ 이 첫 문장은 <눈먼 올빼미>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의 첫 번째 부분은 주인공과 수수께끼의 여인이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느 날 그는 작은 방의 네모난 환기구를 통해 우연히 바깥에 서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된다. 그의 삶의 영감인 동시에 절망의 원천이 되어버린 관능적이고 위험한 그 여인은 사이프러스 나무, 그 아래 웅크리고 앉은 노인과 함께 반복해서 그의 앞에 환영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여인이 갑자기 그의 방으로 들어와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그녀의 시신을 가방에 담아 등이 굽은 노인의 도움으로 고대 도시의 유적지에 매장한다. 이 등 굽은 노인은 명백히 화자의 또 다른 자아이다. 그리고 그는 깨닫는다. "자신의 삶이 시작된 이래로 줄곧 하나의 시신이, 차갑고 생기 없는 움직임도 없는 시신 하나가 어두운 방안에서 자신과 함께 있어왔다고."

 

 11. 알프레드 드 뮈세(1810-1857)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내가 죽으면 / 내 무덤에 버드나무를 심어주게 / 나는 눈물 흘리는 듯한 버들가지가 좋아 / 연한 색깔도 내게는 부드럽고 소중해 / 버드나무는 내가 잠든 땅에 살짝 그늘을 드리울 거야.(<뤼시>,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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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 뮈세의 무덤

그의 친구들은 뮈세의 무덤 옆에 "눈물을 흘리는 듯한 버드나무"를 심었다.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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