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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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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13회에 걸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를 연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준 이재형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콩크에서 리비냐크르오를 거쳐 피자크까지(49킬로, 2일 소요)

 

 □ 콩크를 떠나 그 다음 목적지 리비냐크르오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산등성이를 따라 곧장 리비냐크르오로 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드카즈빌을 거쳐 리비냐크르오로 가는 것이다. 콩크에서 노아이아크까지 1시간 50, 그리고 노아이아크에서 에르 퐁테이으까지 1시간 걸린다.

 순례자를 위해 마련된 휴식 공간인 에르 퐁테이으에서 잠시 숨을 돌린 다음 5분쯤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면 길이 양 갈래로 나뉜다. 똑바로 나 있는 길은 산등성이를 따라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나있는 길은 드카즈빌을 거쳐 가는 길인데, 이 길이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나는 다섯 차례의 순례 중에서 두 번은 드카즈빌을 거쳐서 갔고, 나머지 세 번은 저 아래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산등성이를 따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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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카즈빌로 들어가는 길목 왼쪽에 거대한 분화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분화구가 아니라 데쿠베르트(Découverte)라고 불리는 노천광산의 흔적이다. 이 광산은 1892년에 세워져 2001년까지 채굴되었다. 이 광산의 길이가 3.7킬로미터이고 너비가 2.5킬로미터나 되는 것을 보면 드카즈빌이 상당히 큰 광산 도시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광산은 2001년에 모두 문을 닫았다.

 2016년 현재 인구가 5500명 정도 되는 드카즈빌은 19세기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석탄층과 철이 발견되면서 만들어진 도시다. 루이 18세의 장관이었던 드카즈 1826년 이곳에 아베이롱 석탄제련회사를 설립했고, 이곳은 1834년에 드카즈의 도시, 즉 드카즈빌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되었다.

  드카즈가 이 도시를 선택한 것은 인근에 철과 아연, 석회석 등이 함유된 대규모 석탄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탄 산업뿐 아니라 야금 산업과 제철 산업, 목재 산업, 주물 제조업, 쇠파이프제조업도 같이 발달했던 것이다. 남북으로 10킬로미터, 동서로 9킬로미터이며 북쪽 끝이 뾰족한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지역의 석탄층은 단층이 져 있고 그다지 깊지 않아서 노천에서 바로 채굴하는 방법을 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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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석탄에 기름기와 휘발성 물질, 유황이 함유되어 있어서 공기와 접촉하면 저절로 발화하는 바람에 광산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때로는 석탄층이 무너지기도 했다. 급속하게 발달했던 드카즈빌의 석탄 산업은 이 지역이 지리적으로 고립된 탓에 수송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과 자유무역, 다른 곳에서 생산되는 값싼 석탄으로 위기를 맞았다. 여기에 1867~1869년의 위기는 사회적 상황을 한층 더 악화했다. 광부들이 파업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특히 1869 10월 인근 오방 제련소에서 일어난 파업에서는 군이 광부들에게 발포하여 17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콩크를 빠져나와 바로 나타나는 두르두 드 콩크강에 걸쳐진 로마다리를 건너자마자 급경사의 오르막 산길이 시작된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은 상당히 미끄러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1킬로미터 정도 계속되는 이 산길을 한 시간가량 힘들게 올라가고 나면 그 뒤로는 평탄한 길이다. 이 산길에 있는 생트푸아 예배당에서 바라보는 콩크 전경은 매우 아름답다.

  드카즈빌의 노트르담 성당에는 반드시 보아야 할 걸작품이 있다.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귀스타브 모로가 그린 〈십자가의 길〉이라는 그림 열네 점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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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부터 골고다 언덕에서의 처형, 그리고 매장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말한다. 이 길에는 14개의 지점(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 로마 군인들이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조롱한 곳,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마지막으로 성묘교회)이 있으며, 오늘날의 순례자들은 이 열네 지점에서 묵상하며 이 길을 걷는다. 모로는 혹시라도 20일 만에 이 열네 점의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될까 봐 서명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그림이 100년이 지난 뒤에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질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특히 일본인들은 한 점당 100만 유로가 넘어가는 이 작품을 사겠다는 제안을 했고, 2001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미술전시회에 이 작품을 임대해주면 탄광도시 드카즈빌에 미술관을 지어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 리비냐크르오에서 피자크까지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 언어의 집에 인간이 산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세계관이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822년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수천 년 동안 그 누구도 읽어내지 못했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해내는 순간 인류는 한층 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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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집트 고대 문명의 존재는 이미 1880년대 초에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통해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 웅장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이루어진 이국적인 풍경이 많은 사람을 매혹했다. 이 신비로운 문명은 프랑스 파리에 이집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루브르 미술관 초대 관장인 도미니크 비방 드농이 쓴 《보나파르트 장군의 이집트 원정 동안에 이루어진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여행》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정면이 이집트 하토르 여신의 얼굴로 장식된 카이로 아케이드가 생겼으며, 네 명의 스핑크스가 입에서 물을 뿜어내는 샤틀레 분수를 비롯한 이집트풍 분수가 여섯 개나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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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 위대한 문명을 만들어낸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역사와 생활, 풍습, 종교 등은 여전히 어두컴컴한 어둠에 싸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한 상형문자를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신비한 문자의 문법 규칙을 풀어낸 사람이 바로 샹폴리옹이고, 피자크는 그의 고향이다.

 파리 콩코르드 광장 한가운데에는 무게가 222톤이나 나가고 높이가 23미터나 되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술탄 메헤메 알리가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어낸 샹폴리옹에게 감사할 겸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를 증진할 겸 프랑스 왕 샤를 10세에게 기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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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 오벨리스크는 룩소르 사원 입구에 서 있던 두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기원전 1300년에 파라오 람세스 2세가 세웠다. 오벨리스크는 햇빛을 상징하며, 아몬 태양신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오벨리스크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이어주며, 맨 윗부분을 보면 무릎을 꿇은 람세스 2세가 아몬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있다.

 이 오벨리스크를 룩소르에서 파리로 옮기기 위해 룩소르라는 이름의 배를 특수 제작했다. 43미터 길이에 너무 높지 않아야(9미터) 했다. 그렇지 않으면 파리의 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벨리스크는 1831 10월에 룩소르를 출발해 1833 12 23일 파리에 도착했고, 1836 10 25일 왕과 왕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콩코르드 광장에 세워졌다.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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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Paris님의 댓글

  • Paris
  • 작성일
작가님 사진과 글 정말 흥미롭게 잘 보고 읽었습니다. 작가님과 파리광장 감사합니다.

최고관리자님의 댓글의 댓글

  • 최고관리자
  • 작성일
저희도 감사합니다.
6월 말에 작가님의 프로방스 여행 책이 출간됩니다.


또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