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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큐 맘, 지니의 단상> 차이의 설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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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실수가 새로운 탄생이 된 경우들이 있다. 예를 들면, 브라우니는 미국의 어느 주부가 쵸콜렛 케잌에  실수로 베이킹파우더를 넣지않아 우연히 탄생된 음식이다. 그 뿐 아니라 두부는 어느 중국인이 부모님을 위해 콩국을 끓이다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만들어졌고, 씨리얼 또한 켈로그 형제가 밀반죽을 압축기에 넣는 걸 잊어버려 굳어버린 밀반죽이 아까워 롤러에 돌려 조각조각 만들어진 음식이다.

똑같이 완벽한 공식대로만 살았더라면 인류에게 진화나 발전이라는 역동적인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인류는 돌연변이의 역사다. 55천만년전 선구동물(연체동물, 곤충,갑각류)의 염기서열의 변화를 시초로 고등동물까지의 탄생을 만들어냈고, 지금도 우리 몸속에서는 무수한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있으나 대부분 자가 교정에 의해 없어지고 일부는 남아 유전형질의 변화로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반대로 "동일성"이라는 용어를 들으면 왠지 흐트려 버리고 싶은 어쭙잖은 맘들이 생긴다. 50넘은 아줌마의 왠 삐딱선이냐겠지만 동일성과 전체성은 누군가가 집단을 조절하기 편리하게 하기위해  규정과 규범의 구조속에 가두어버린 느낌이다. 그 규범에서 어긋난 개체는 윤리적 준칙에 어긋남이 없더라도 이탈자라는 오명으로 도태되어버리기 쉽상이지만 이  이탈자는 때로는 새로운 역사의 시점이 될 수도 있다.

파리 17구 출생 소르본 대학 출신의 "질 들뢰즈", 나는 요즘 그의 철학에 빠져 있다. 질 들뢰즈를 검색어로 치면 차이와 반복, nomadism, agencement, 앙띠 오이디푸스, 가타리 등의 연관 검색어가 뜬다. 질 들뢰즈는 구조주의, 경험주의, 관념주의 철학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영토화(환경)와 코드화(규칙)속의 관계를 배치(agencement)로 바라보고 이 아장스망은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속성을 가지며 이 때의 변화를 긍적적 사고의 운동으로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는 누군가의 윗사람이 다른 이의 아랫사람이 되고, 어느 생산자는 마트에서 소비자가 되기도 하고 어느 작가는 다른 작가의 독자가 될 수도 있다. 정해진 불변의 자아로 고착되는 본질적 자아 따위는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는 본질로 정의된 자아로 마침표를 찍는 게 아니라 다양하고 변화하는 맥락속에 존재함으로써 통합과 융합의 모습으로 지금도 변화하고 있을 따름이다. 기존의 패턴속에서 불거져 나오는 차이는 발전으로 발아하기위해 움트고 있는 씨앗이고, 백조의 꿈을 담은 미운 오리새끼이다.

내가 싫어하는 속담이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등인데, 대단한 예지력을 가진 사람도 못해 내는 능력이다. 분명 선입견이고 편향적 사고로 인한 생각의 실수다. 비록 초라한 떡잎이지만 그 또한 양분과 햇빛, 그리고 어느 농부의 세심한 돌봄이 있다면 뿌리깊은 나무로 잘 자랄 수 있고, 오늘은 흐리지만 내일은 해가 뜰 수도 있는 게 사람살이 아닌가.  미래는 예측불허로 남겨두는 게 훨씬 더 흥미롭다. 단 아장스망의 변화를 읽어낼 나의 사고를 좀더 튼튼하게 만들어가고 싶다. 홀로그램 같은 빛의 얽힘 속에서 나를 향해 비춰지는 빛줄기를 잘 찾아가는 마음의 불빛을 밝히는 건 오롯이 나만의 몫인 것 같다. 누구에게나 삶의 변곡점들은 크게 작게 수도 없이 다가온다. 그 사건을 해석할 수 있는 상식과 일반적 사고가 아니라 이면과 변화에 주력하는 사고의 새로운 아장스망은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있는 빛이고 힘이다.

 

<땡큐 맘, 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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