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이장 박성진 칼럼> 파리 낯설게 보기, 첫번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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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지하철 7호선 « 플라스 몽쥬(Place Monge) »역에서 내려 광장 쪽 출구로 올라오니 난데없이 장터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 그대로 ‘가는 날이 장날’이다. 출발이 나쁘지 않다. 이곳 몽쥬광장에서는 일주일에 세번 장이 들어서는데 오늘이 그 중 한 날인가 보다. 주변에 현대적인 상점들이 적지 않은데도 장날을 기다려 찾아오는 주민들 덕에 장터는 북적인다.
플라스 몽쥬 역은 근처의 무프타르 거리, 팡테옹, 셍테티엔뒤몽 성당, 소르본느 대학 등의 명소들에 접근하기에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들 중의 하나다. 그래서 그런지 지하철에서 올라오는 사람들 중에는 아시아 사람들도 곧 잘 보인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의 목적지는 그런 곳들이 아니 듯 하다. 그들은 장터의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 하다가 이내 목적지를 재설정하고 광장을 빠져 나간다. 광장과 맞닿은 좁은 길 건너편에 있는 바로 그 ‘유명한’ 약국을 향해서. 만약 이들 중 누군가가 ‘아레나 드 루테스’로 가는 길을 묻는다면 ‘기꺼이 그곳까지 동행 해 주리라’ 마음먹고 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주변의 많은 명소들에도 불구하고 몽쥬 거리 자체는 주거지역에 가깝다. 굳이 이 거리의 눈에 띄는 특징을 말하라면 전형적인 파리의 거리 모습 그 자체라는 것. 비슷한 모양에 비슷한 회백색의 석조 건물들이 높이까지 맞추어 늘어서 있고, 각 건물들이 저마다 길가에 카페와 레스토랑들과 각종 상점들을 펼쳐놓고 있는 그 풍경 말이다.
그러나 이 거리는, 별 기대 없이 이 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불쑥 낯선 것을 드러내기도 하고, 다른 곳을 찾아 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문득 다른 시공간 속으로 들여 놓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 “파리 여행을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몽쥬 거리부터”라고 대답해 주곤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은 분명 에펠탑과 루브르만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광장과 맞닿은 몽쥬가에서 약국 쪽으로 가는 사람들과 반대방향으로 발길을 잡는다. 건물들에 붙어 있는 번지수가 줄어드는 것은 센느 강 가까운 쪽을 향한다는 말이다. 인도를 따라 늘어선 가게들을 스치며 걸어가다가 오른쪽 주택가를 향하는 한 골목 어귀에 이르면서 어떤 감각적 부조화들의 혼재에 걸음을 멈춘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변의 건물 높이 만큼이나 키 크고 무성한 나무들이다. 이 나무들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골목 한 편을 따라 주택가 안쪽으로 휘어들어가고 있는데, 그것들을 막아서고 있는 철제 울타리를 훌쩍 넘어 길 맞은 편의 가지런한 건물들을 덮칠 듯이 기세가 사납다. 파리에서 주택가 사이의 작은 공원들이야 흔하지만 나무들이 야생적으로 보일 정도로 방치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어서, 길 모퉁이 근처, 큰길과 맞닿은 곳임에도 나무들의 기세에 눌려 조금 외진 느낌마저 드는 곳에 단층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 온다. 벽돌 모양이 그대로 노출된 직사각형 전면 외벽에 두 개의 아치형 출입문만 나있는 단순 구조인데, 아마도 저 나무들 너머에 있을 공원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인 듯 하다.
그런데 조금 자세히 보니 이 건물은 두께가 없는 하나의 담장이다. 나무들이 이 전면 외벽 뒤로 바짝 붙어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담장은 아니다. 얕긴 하지만 내부 공간이 있다. 분명 깊이가 있는 건물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저 나무들이 저렇게 외벽 뒤에 바짝 붙어 자랄 수 있는 것이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이 건물은 2차원 벽인가, 3차원 공간인가?’ 이상한 점은 또 있다. 길 쪽에서 바라보면 분명 입구는 있지만 뒤쪽은 막혀 있다. 그렇다면 건물 너머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도 아니다. ‘대체 이곳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혼돈과 의문이 교차되는 사이, 의외로 인적이 그리 드문 곳은 아니어서 곧 바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곧장 아래로 사라지고 또 아래 쪽에서 사람들이 올라온다. 마치 2차원 벽을 통해 숨겨진 세계를 오가는 사람들처럼.
두 출입문 사이의 창에 붙어 있는 붉은 색 큰 글씨가 눈에 들어온 건 그 다음이었다. “메트로METRO”! 바로 환상에서 빠져나온다. 알고 보니 여기가 지하철 몽쥬 역의 또 다른 출구였던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 안되는 점들이 있다. 이곳은 광장 쪽 출입구로부터 150여 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역 하나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파리 지하철에선 이례적이다. 게다가 출입문의 방향은 큰 길인 몽쥬 가가 아니라 좁은 나바르 길 쪽으로 나 있고, 나무 그늘에 덮여 음습한 느낌마저 든다. 더욱이 그 모양조차 여느 지하철 역 출입구와 전혀 다르게 생겼으니 얼핏 봐서는 지하철 역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이용자들의 편의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 지극히 프랑스적인 발상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프랑스에선 이처럼 편의성이 무시된 곳에 어떤 특별한 의도나 의의가 숨겨진 경우가 종종있다. 이곳의 두 개의 출입문들은 각각 그 위에 반원형 아치들을 얹고 있는데, 이 아치들은 또 굵은 원기둥들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곧 이곳의 출입구들은 아치들과 기둥들에 의해 벽이 트인 부분들인 것이다. 이 출입구를 고안한 사람이 일관되게 고대 유적의 특징들을 소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특징이 이 지역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골목 어귀를 스쳐 지나가려다가 정작 가장 큰 시각적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또 걸음을 멈춘다. 바로 큰 길과 작은 길의 모퉁이에 있는 건물 그 자체다. 길모퉁이 건물이니 최소 두 면이 보여야 하는데 골목 안쪽으로 있어야 할 면이 없다.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무들과 벽 모양의 출입구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골목 쪽에서 바라보면 이 건물은 마치 평면 무대장치처럼 두께가 없는 구조물로 보인다. 그런데 큰길 쪽에서 다시 확인해 보면 여느 건물들처럼 내부에 깊이도 있고, 실제로 가게들도 들어서 있다. 여기서도 2차원과 3차원의 혼돈이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건물들의 역할은 어떤 영역을 제한하는 벽과 같은 것이다. 반면 나무들은 원시적 활력으로 그것들을 뛰어 넘으며 거리로 뛰쳐나오려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형국은 이 지역의 역사와 특징에 대한 은유를 환기시킨다.
사실 이 지역은 파리의 역사에서 최초로 도시가 형성되었던 곳, 곧 고대로마의 도시 루테스가 있던 곳이다. 2천년 세월에 고대 도시의 흔적들은 대부분 덮이고 사라졌지만 그 일부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 공존하고 있다.
프로이드는 주장했다. 이미 사라졌어야 하는 것이 문득 우리 앞에 나타날 때, 또는 익숙한 것에서 생소한 국면을 발견할 때, 우리는 낯선 감정을 가지게 되고 이것은 두려움의 일종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다른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밟고 선 땅 아래 과거가 켜켜이 누적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잊혀졌던 고대가 존재를 드러내며 현재의 일상과 중첩되는 것을 느낌으로써, 삶이 두텁고 풍요로워 질 수 있다는 경험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우리의 여정 내내 함께 찾아갈 가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지역의 터줏대감이자 역사의 거인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파리이장, 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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