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의 작품이 젊어지고 있다
작성자 정보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0 추천
- 목록
본문
-퐁피두 센터, 체르누스키 미술관, 테사 해롤드 화랑 전시-
글 : 최옥경 / 프랑스 보르도 몽테뉴 대학 부교수
Okyang-chae@u-bordeaux-montaigne.fr
2017년은 과히 프랑스에서 이응노의 해라고 할 만하다. 지난 9월 20일부터 퐁피두 센터 5층에서 Donation Lee Ung-no전시가 오픈했다. 부인 박인경 여사와 아들 이융세 작가에 의해 기증된 회화 13점과 조각 3 점, 그리고 몇몇 전시 카탈로그와 사진들이 선보인다. 거장 마티스의 수작들이 줄줄이 있는 전시실 바로 건너편에 이응노의 작품들이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을 드러내며 한 방 가득 전시된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지난 6월부터 열리고 있는 체르누스키 동양시립미술관 전시 LEE Ungno – Hommes des foules 카탈로그 집필에 참여하면서 작년 가을부터 이응노 작가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Vaux-sur-Seine에 인터뷰를 하러 여러 번 가게 되었다. 이융세 작가가 아카이브에서 이응노의 작품들을 하나 하나씩 보여줬을 때 새삼 작품들의 다양한 면모에 놀랐고 특히 군중 시리즈 중의 1986-87년의 몇 작품들을 보았을 때는 헉하고 숨을 죽이게 되었다.
이응노는 1958년 12월 한국을 떠나 1년의 독일체류 후 1959년 12월 부터 프랑스에 정착했고, 1989년 파리에서 눈을 감기까지 예술 인생의 절정을 바로 이 곳 프랑스에서 보냈다. 한국 미술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의 작품들의 다양한 면모는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북한의 스파이라는 부당한 누명으로 1967년 납치되어 2년 반 동안이나 투옥되었고 70년대 말부터 고국에서 오랫동안 작품 판매가 금지되는 수난을 겪은 것과도 관계가 있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2007년 개관된 대전 이응노 미술관이 체계적으로 아카이브 정리를 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다양한 양상이 공개되고 있지만 그가 30여년 이상 자리잡았던 프랑스의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현재 퐁피두 전시실 비트린에는 1989년 작가가 운명했을 때 열렸던 체르누스키 미술관에서의 전시 팜플렛이 소개되고 있는데, 현재 같은 미술관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는 30여년만인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체르누스키 미술관 (11월 19일까지) 만이 아니라, 퐁피두 센터 (11월 24일까지) 그리고 테싸 해롤드 화랑에서도( 10월 21일까지) La Danse des signes – Ungno Lee, Georges Noël, Mark Tobey전이 열리고 있는데다, 부인 박인경 여사와 아들 이융세 작가의 작품도 체르누스키 미술관의 일부 전시실에 소개되고 있어서( 2018년 1월 7일까지) 마치 파리 곳곳에서 이응노의 불꽃놀이를 보는 듯하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들이다.
모던에의 의지
이응노가 한국을 떠난 1950년대 후반에는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화된 유럽 미술을 봐 왔던 한국 작가들에게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파리로 가서 유럽 미술을 체험하는 것은 공통된 깊은 갈망이었다. 50년대말 남관, 이성자, 김환기, 문신 등이 그 뒤를 이어 1960년대 초반에 한묵, 정상화, 김기린, 김창열, 방혜자 등이 파리로 떠나왔는데, 그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동양화를 공부한 사람이 이응노였다.
이렇듯 동양화로 시작한 작가임에도 그의 예술 여정을 돌아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모던에의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젊은 시절 충청도 홍성을 떠나 김규진에게서 동양화를 배우려고 서울에 온 것도,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과 여러 번 입선을 거쳤음에도 30대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화와 서양화 기법을 공부한 것도, 45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박인경 여사와 어린 아들 융세를 데리고 도불한 것도 바로 이런 그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2년 파리 폴 파케티 Paul Facchetti 화랑에서의 이응노 파리 첫 개인전은 꼴라주만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근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지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이응노)던 그의 확연한 자세의 귀결점이었던 것이다.
꼴라주
꼴라주는 60년대 초에 결코 새로운 테크닉이 아니었지만 동양화 스승 밑에서 대나무 그림을 그리던 이응노를, 거의 예순이 다 되어가는 그를 생각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퐁피두에 전시된 1956년의 세 작품이 보여주듯 그는 도불 이전에 이미 풍경을 모티브로 한 반추상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해저 Fond marins (1956)는 다소 칸딘스키 작품을 연상시키지만 종이 위에 먹과 색으로 그려진 그림이고, 수직적 작품 포맷과 왼쪽 하단에 수직으로 쓴 한자 사인과 낙관은 여전히 동양화를 상기시킨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에서는 흔히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의 드리핑이나, 마크 토비Mark Tobey의 작품들의 성향을 발견하는데 (테싸 해롤드 화랑 전시에서 이응노와 마크 토비를 같이 전시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들은 그당시 일본이나 한국뿐 아니라 앵포르멜 미술이 성행하던 유럽에서도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응노는 1952년 폴록을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한 파케티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게된다. 이곳은 프랑스 앵포르멜 미술을 주도했던 미셸 타피에Michel Tapié가 50년대초 아트 디렉터로 일을 했던 곳으로, 조르주 마튜Georges Mathieu가 관객들 앞에서 한 두 시간 안에 대작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하는 등 그야말로 앵포르멜 미술의 온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정확히 십년 후 한국 작가, 그것도 동양화를 하던 이응노가 개인전을 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일이다. 박인경 여사가 필자에게 한 증언(2017년 1월 12일)에 따르면 60년대초 파리 근교 아니에르 Anières에서 체류하고 있었을 때 폴 파케티가 찾아와 이응노가 하고 있던 꼴라주 작품을 하도록 많이 부추겼다고 한다. 그것은 이응노의 꼴라주가 엥포르멜 미술에서 보이던 강한 텍스추어를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꼴라주라고 하지만 종이만을 부쳤으니 실은 파피에 꼴레 papier collé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파케티 화랑에 전시된 이응노의 역동적인 콜라주 작품들은 제법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 때 나온 흑백 카탈로그도 퐁피두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퐁피두 전시에서 1960년에 제작된 두 점의 꼴라주 작품은 일반적으로 소개되는 역동적인 구성의 꼴라주 작품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특히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듯한 강렬한 수직 구성의 ‘’무제Sans titre (1960)’’ 앞에 서면 패기를 가지고 프랑스에 정착한 1960년의 이응노를 바로 앞에 마주한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 이후 60년대 중반에 이응노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문자 추상인데, 그토록 현대성을 추구하던 그가 역설적이게도 한자에서, 그것도 중국 고대의 초기 문자에서 작품 모티브를 찾은 것은 의외다. 그 당시 철학계에서 가진 기호에 대한 관심은 미술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켜, 자오우기 Zao Wou-ki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문자에서 작품 모티브를 찾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1959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를 보고 이응노가 동아일보에 보낸 글을 보면 그가 그 전시에서 가장 큰 인상을 받은 작가들은 당시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작품을 했던 안토니오 타피에스 Antonio Tapies,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 졸탄 케메니Zoltan Kemeny같은 이들이었고, 그 이후로 이응노는 추상으로의 이행을 단행한 것만이 아니라, 이차원의 평면성을 뛰어넘으려 꼴라주마저 시작했다. 이토록 가장 아방가르드한 작가들의 경향을 쫓던 그가 한자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동양과 서양을 통합해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서양에서 작업하는 동양 작가로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파리동양미술학교
이응노는 항상 자신이 한국인임을 강조해왔고 서양에는 서양미술을 배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동양 미술을 가르치려고 왔다고 역설했다. 이런 마음 자세 탓인지 그는 언어 소통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동양화를 가르쳤다. 짧은 체류기간에도 독일 본의 한국 대사관에서 동양화 수업을 했고 무엇보다 1964년 파리 체르누스키 시립 미술관에 동양미술학교l’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당시 현대미술에서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했던 동양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갈망의 구심점과 해소점이 되었다. 이 때 프랑스의 각계인사들 14명 중 화가인 한스 아르뚱 Hans Hartung이나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 후지타 추구하루 Fujita Tsuguharu, 구미 스가이Kumi Sugai, 자오 우기 Zao Wou–Ki 같은 화가들이 이 학교 설립을 옹호했으며 특히 이들 중 여러 명이 이응노가 1967년 느닷없이 한국에서 옥고를 치루게 되었을 때, 그를 도와주려는 서명 운동에 참여를 했다. 종형을 선고받았던 이응노는 결국 이 년 반만에 풀려나게 되는데, 최근 필자는 그 당시 부당하게 구속된 예술인들을 구하려고 실제로 발벗고 뛴 인물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르구리에렉Le Gouriérec부부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풀려나도록 프랑스 정부와 종교계에 끊임없는 호소를 하고 개인 비용까지 들여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 갔을 뿐 아니라, 투옥된 한국 친구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결국 그 딸을 입양해서 자신들의 다른 세 아이와 같이 키운 놀라운 프랑스인 부부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차후 더 자세한 연구를 하겠지만 역사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무대 뒤의 이러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파리동양미술학교에서의 교육 활동은 이응노가 현대 미술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서예나 동양화를 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그가 꼴라주 이후로 펼치게 될 60년대 초기문자추상과 70년대 후기문자추상은 현대 미술이지만, 다 동양의 문자를 기초로 한 것이었고 80년대의 군상 시리즈는 아예 화선지 위에 먹으로 제작한 작업이라 문인화의 전통과 연결되어질수 있다. 체르누스키 미술관 전시에서 서양화와 동양화를 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서양화작가 이응노와 동양화작가 이응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작품의 원천으로 쓰는 것이다.
문자 추상
60년대 이응노의 작품들은 화면 전면에 한자 비슷한 형상들이 떠다니거나 몇 줄로 나열된 양상을 띠는데 꼴라주나 데꼴라주의 기법을 사용해, 간혹 문자들이 지워진 것처럼 아스라히 사라지는 듯하다. 거기다 아교나 먹을 뿌려 곰팡이가 쓸거나 퇴색한 듯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이응노는 풍화된 비석의 이미지에 이끌렸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우리 나라의 오래 된 비석처럼 그 낡은 돌의 마티에르, 돌에 새겨진 문자 등, 오랜 세월에 걸쳐 풍우를 견디어 온 비석들의 문자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런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문자에 관한 테크닉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이응노) 필자는 이 인터뷰를 처음 읽었을 때 그것을 은유적인 의미로 해석을 했었다. 그러나 현재 퐁피두나 테싸 헤롤드 화랑에 전시된 몇 작품은 그가 화폭 위에 모래를 끌어들이고 바랜듯한 색을 쓰면서 실제로 비석의 돌이 주는 질감의 효과를 자아내려 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1967년에서 1969년 사이 이응노가 투옥된 동안 작가로서 가장 괴로운 것은 작품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죽음과 같은 것이라고 술회한다. 그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재료가 없는 상황속에서 음식물이나 포장지, 화장지 등으로 한 작품들은 작가에게 작업은 진정 생존의 양식임을 처절히 보여준다. 처음에는 종이를 구할 수가 없어서 감옥에 들여진 설교문 같은 것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그 중 서울 서대문 구치소에서 그린 것이 현재 퐁피두 자료들 가운데 전시되어 있다. 낡은 설교지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이미지들이 함께 볼펜으로 윤곽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는데 60년대 중반의 흐릿하고 머나먼 향수를 자극하는 그림에서 70년대의 윤곽선에 둘러싸인 모티브들의 전환이 이미 이때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1970년대 회화에 있어서는 단순한 한글의 자모와 유사한 형상들이 점점 더 눈에 띄인다. 형태들은 급격히 도형화하여 간결하고 평면적인 형태로 전환된데다가 이 형태들은 윤곽선을 두른 정돈된 도형으로 다듬어진다. 거기다 1960년대의 어두운 색조에서 벗어나 원색이 자주 사용되어 밝고 화사한 색채들이 많아졌다. 이처럼 70년대의 작품들의 색이 강렬해지고 다소 디자인에 가까운 양상이 더해지는 것은 아마도 그가 69년 프랑스로 돌아온 후 타피스리나 세브르의 도자 등의 주문을 많이 받아 모티브를 더 단순화하고 장식성을 띠게 할 필요성을 느껴 그쪽으로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70년대 이후 그는 다양한 재료로 작업을 해, 10미터가 넘는 조각을 하거나, 깨진 기화로 벽화를 만들고, 양털을 붙이거나 짚을 삽입한 회화를 하는 등, 옥중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료를 불문하고 작업의 영역을 확장했다.
<군상>
이렇게 60년대와 70년대를 이어온 문자 추상 작업은 한국의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이라는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든다. 처음에는 70년대 문자들처럼 테두리 윤곽선에 둘러싸인 인물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다가 점점 화선지 위에 먹으로 신속하게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는 화면 위에 약간 경직되게 여러 줄의 행렬로 여기저기 서서 열 마다 동일한 동작들을 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넘치는 생동감으로 팔을 뻗고 다리를 벌려 다이내믹한 율동감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다. 작가 자신이 설명하기를 : "내 그림은 추상적이지만 광주 항쟁이라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 구상적인 요소를 담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랍니다. 광주 항쟁 및 세계 많은 사람들의 핵반대 운동에 대한 심정을 토대로 표현해 보았어요. 요즘은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이 내 그림 화면에 등장하고 있지요. 이번에는 200호가 넘는 화폭에 수천 명 군중들의 움직임을 그려 넣었어요… 이제부터 나 자신 스스로 저 민중 속에 뛰어들어 여생을 보낼 생각입니다. 매일 매일 군중의 외침을 캔버스에 옮겨 내고 있지요." (이응노) 1985년의 이 고백대로 그는 마지막까지 군상 작업을 했다.
이 군상시리즈야말로 이응노 작업의 총집적이다. 거기엔 꼴라주에서 보였던 역동성, 문자들을 닮은 인물들, 추상회화의 올오버 All-over, 문인회화에서 말하는 기운 생동, 그 모든 것들이 다 집약되어 있다. 어떤 작품에서는 그 다양한 동작을 하는 형상들뿐만이 아니라, 그려지지 않은 여백까지 환하게 열려있다. 온몸에 전율을 자아내도록 생명감으로 충만하다. 이응노는 항상 "서양의 새로운 추상적 형태의 추구와 동양화가 추구하고 있던 것이 어울려 하나의 세계적인 경향으로써 서로 만나게" 될 것을 원했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것의 종합을 추구해왔다. 그의 염원은 군상시리즈에서 눈부시게 시각화되어 있는 듯하다.
드라마틱하게도 이응노는 1989년 서울 호암미술관에서 전시 오픈이 있던 날, 프랑스에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치 김환기가 뉴욕에서 그러했듯이, 이응노도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의 절정에서 타계했다. 역사는 계속 쓰여지고 있어서 그의 군상들은 화폭 밖에서 도 소리없는 아우성을 계속 치고 있고, 이응노 레지던시에 온 어느 젊은 작가에게서 전해들은 박인경 여사의 말처럼 "이응노의 작품은 젊어지고 있다".
관련자료
-
다음
-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