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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프랑스에서 한국어 교육의 산 증인, 임정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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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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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한글서예전이 열리고 있었던 파리 퐁데자르 갤러리에서 파리 빅토르뒤리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방문해서, 서예가들의 서예 시범을 보고, 학생들이 직접 써보는 행사가 있었다. 이때 눈에 띄던 어떤 선생이 있었다. 그는 생기 넘쳤고,활기있었으며 무엇보다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해 보였다. 빅토르 뒤리고등학교의 한국어 교사, 임정원 선생이었다.당시 그는 파리에서 빅토르 뒤리 뿐만 아니라 장송드 사이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기차를 타고 지방 도시인,루앙Rouen에까지 한국어를 가르치러 다니고 있었다.힘들지않냐고 하니 그 특유의 쾌활함으로 재미있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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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10년 동안 그는 한글학교에서 프랑스 고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대학교에서 프랑스 학생들 그리고 교포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중〮고등학교 공교육 체계 속의한국어 교육 보급의 현장에서 뛰어왔고, 프랑스내 한국어 교육의 역사적인 순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이런역할을 한 그가 파리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왠지 이제막 잘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가지말라고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임정원 선생을 만나 그의 이야기와 그간의 한국어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불문과 출신이시던데 어떻게 한국어 선생님이 되셨어요 ?

- 1992년부터 2017년까지 25년 동안,중간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전념했던 시간 1년 반 정도 빼고는,계속해서 쉬지 않고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가르쳐 왔어요. 한국에서도 여기 프랑스에서도요. 프랑스 문학을 너무 좋아해서 사실 프랑스에 유학 오고싶었지만 사정 상 포기하고 대학에서 불어를 가르치며 박사 과정을 마쳤는데 논문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그런데 그때 마침 모교에 있는 한국어학당 덕분에 ‘한국어교육’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알게 되었죠. 90년대 초만해도‘한국어교육’이란 용어 자체도 낯설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었어요.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면 “영어를 잘하나?”아니면“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거 아니야?”라고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알아보니 어학당 일은 문학 못지 않게 언어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제 적성에 잘 맞을 것 같고 아이를 낳고도 계속 하기에 좋다고 생각해서 결단한 거죠. 돌이켜 보니 그것이 바로 제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도전이었는데 ‘신의한 수”가 된 첫 번째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프랑스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오시게 되었어요 ?

-2007년,마흔 살 때 왔어요.불혹의 나이에 다시 모든 것을 버리고 제 인생의 두 번째 선택을 한 거죠. 연세대 한국어학당은 최대 규모의 한국어 교육 전문 기관이고 인프라와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어서, 약 12년동안 일하면서 많은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죠.한국어 교육 분야는 학문적 체계도 잡혀 가고 계속 엄청난 발전을 하는 중이라 비전도 있었고요. 가르치고 교재개발 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고요. 당시 주2회 서울에 있는 하비에르 국제학교에 출강을 하게 되었는데요, 프랑스 교육체계를 직접 체험해보니 너무나 좋고 제 아이에게 잘 맞을 것 같아서 프랑스에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어요. 또제 전공인 불문학과 한국어교육 경험을 살려 ‘비교문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다시 생기기도 했고요. 

 

아이 교육과 박사논문을 위해 프랑스에 오셨는데 어떻게 한국어를 가르치시게 되었어요 ?

-경제 사정이 안 좋아서 프랑스어 과외를 많이 하게돼서 박사논문에 매진하기 힘들어졌죠. 한국에서 12년이상 해온 일이 한국어 교육이다 보니 프랑스에 온 지 얼마 안돼  <파리한글학교>에서 가르치게 됐어요. 당시 한글학교는 큰 변화를 겪으며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체계적인 교수법도 교육 과정도 없었어요. 제 경험을 살려 당시 한글학교 교장 함미연 선생님과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교육과정과 교안 등의 기초를 닦기 시작했고 유럽 교사 세미나마다 초청되어 강의를 했죠.한글학교에서한국어를 4년동안 가르쳤는데 그때 교육부 공모 프로젝트인<맞춤 한국어>라고 해서 각국의 환경에 맞는 한국어 교재를 만들게 됐어요. 그리고 교육원과 아펠락의 후원으로 프랑스 청소년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들도 공동집필 했어요. 

 

-한글학교?한글수업? 한국어 수업?어떻게 다른 거죠 ?

외국에 사시는 분들은 ‘한글’과 ‘한국어’를 구별하지않는 경우가 많아요. ‘한글’은 알파벳,한자처럼 문자 체계의 이름이고, ‘한국어’는 프랑스어,중국어처럼 언어의 이름, 즉 말과 글 전체를 통칭하는 거죠.흔히‘한글 배우러 간다’,‘한글수업한다’고들 하는데,그럼마치 단순히 ‘가,나,다,라…’즉,한글 자모 읽고 쓰기만을 배우거나 가르친다는 뜻이 돼요. 말은 할 줄아는데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할머니들이나 어린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못깨우쳤다’ 또는 ‘한국어를 못떼었다’라고 하지 않고 ‘한글을 못깨우쳤다’, ‘한글을 못 떼었〮다’라고 하잖아요?


또 한글학교는 프랑스의 공교육 기관이 아니라 거기서 하는 수업은 방과 후 활동이나 특활, 즉 Activité나Atelier 같은 거예요. 그런데 프랑스학교에 정식으로 개설된 한국어 수업은 프랑스 공교육 체계 안의 정규 교과목이 되는 거죠. 한글학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서 익숙한데, 프랑스 고등학교의 교과목으로 ‘한국어 수업’이 생긴 지는얼마 안 되니까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부터는학교에서 교과목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 있으니까 바칼로레아 총점은 물론 내신 향상에도 도움이 되요.

 

한국어 수업이 프랑스 고등학교에 개설된 지가 얼마나 되었나요? 그렇게 되기까지는 참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프랑스 고등학교에 한국어가 정규과목이 된 게 2011년 9월이에요.파리지역고등학교 연합 언어 교육 프로그램으로 한국어 수업을 개설하기 위해 수업설명회를 하는데 최정례 전 교육원장님,당시이 부분을 담당하셨던 이부련 전 교육원장님과 교사로서 제가 갔죠. , 그때 파리 빅토르 뒤리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5명만 신청하면 파리 교육청에서 수업을 열어준다고 했다고하셨어요. 당시 우리 교육원 측에서는 걱정이 많았어요.학생수가 안 될까 봐서요. 그런데 첫 해에 70명 이상이온 거에요. 10배가 넘는 거죠.게다가프랑스 학생들이 30명 이상 등록했고요.모두 놀랐죠. 그래서 다른 두 교사를 더 뽑아 첫 해부터 3반이 열렸답니다.

 

이렇게 예상밖으로 학생들이 많이온 이유는요 ?

-물론 양국 특히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교육부의 정책적 지원, 프랑스 중고등학교의 교장들의 적극적 협력,교육원장님들의 노력이 있었죠. 그런데 무엇보다도 저는 몇 년 전부터 아펠락(한국 한불언어문화교육자협회,회장이진명)의 한국문화 아틀리에 덕분이라고 생각해요.사실언어 그 자체에 관심이 생겨 배우겠다고 나서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이미 수 년전부터 양국 교육부의 후원 아래 아펠락의 전〮현 사무총장님과 예술 강사들이 프랑스 중 고등학교에서 아틀리에를 열어 헌신적으로 한국문화를 소개하고공연을 기획하고 홍보해왔기 때문에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통해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이어져서 성과를 내기 시작한 거죠.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 한불상호교류의 해 때,프랑스 중학교에 한국어가 정식 과목이 되고,선생님이 강의 시연을 하셨는데,그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130주년 개막식 직전,당시프랑스 교육부 장관과 한국의 국무총리 등 양국 정치 교육계 인사들이 귀스타브 플로베르 중학교를 방문했을 때 제가 수업 시연을 했어요.다행히 재미있게 잘했나 봐요. 벨카셈 교육부 장관이 끝나자마자 제일 먼저 제게 따로와서 저의 교수법을 구체적으로 극찬하면서 프랑스의 교사들이 모두 보고 배우면 좋겠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학교도서관에서 바칼로레아에서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지정했다고 발표했어요.최초의 공식적인 발표였어요. 올랑드 대통령의 발표보다 먼저였죠.그리고 플로베르 중학교가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최초로 가르치는 자랑스러운 학교라고 치하했고요. 이미 양국의 외교적인 협의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식적인 발표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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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중고등학생 상대로 하는 한국어 수업과 이곳 한인자녀들에게 하는 한국어 수업은 다르겠어요.   

-맞아요. 제가 직접해왔던 프랑스 초〮중〮고등 그리고 대학생을 대상으로 나누어 말해보자면, 한글학교, 프랑스 중〮고등학교로 볼 수 있는데요,한글학교는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공교육은 아니고 주로 교포와 한불 가정 학생들 대상이고요. 저는 프랑스 중고등학교도 맡고 있는데 크게  프랑스 학생들과 한인 학생으로 나눌 수 있어요. 수요일에는 파리 지역 고등학교 연합 수업으로 프랑스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중,고급반이 있는데저는 고급반을 맡아 프랑스 학생들의 바칼로레아 시험을 준비시켰고요, 토요일에는 주로 교포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반을 가르쳤죠. 플로베르 중학교에서는 프랑스 중학생들에게 필수선택 과목인 제2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가르쳤고 8대학에서는 교양 수업으로 한국어를 강의했었어요.

 

선생님은 정말 프랑스에서10년간 한국어 교육 현장에서 뛰신 분이네요.

-전 그게 너무 좋아요. 제발돈 되는 일 좀 하고 하지만 나이에 맞는 지위를 좀 찾으라고들 하는데,제가 사실 돈도 지위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거든요. 그런데저는 좀 낮은 지위, 좀 험난한 교육 현장에서 더 큰 것들을 얻으며 행복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한편 늘 힘들기도 했고 가지 않은 길은 미련이 있게 마련이지만요.제 몫의 일을 잘했다는 점에선 자부심을 느껴요. 프랑스에서 한국어 교육이 잘 되려면, 사실 외교적,정치적,정책적,행정적…정말 다양한 차원에서 각자 몫의 역할이 있는 거 같아요. 저는“교육 현장의 노동자”몫을 열심히 잘했다고 자부해요.

 

한국어를 프랑스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자부심이 없으면 못할거 같아요.

- 저는 제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가졌다는게 무척 행복해요. 이 풍부한 언어가 내 모국어인 게 너무 기뻐요. 하지만 한국어가 최고라고 “들이대는” 건 자부심 때문이 아니라 열등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거부감만 주죠. 제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좋아하면 잘 가르치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게 되고 좋은 교수법을 찾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뜨겁지” 않으면 어떻게 학생들을 뜨겁게 할 수 있겠어요? 


한국어와 불어를 섭렵하고 계시는데요, 특별히 언어교육에 대한 조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제가 가끔 하는 말이 있는데요. “나는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만큼 ‘언어’라는 건 인간 존재에게 본질적인 거라고 절감했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건,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엄청난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언어를 배운다는 건 말이나 글을 넘어, 문화와 사회 그리고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역기 “동기 부여”겠죠. 좋아해야 잘하게 되고 잘해야 좋아하게 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야 되고, 학생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뭔가 작은 거라도 이루어 내면 그 다음부터는 나아갈 수 있게 되니까요. 학생들이 제게 가끔 그래요. 왠지 선생님 “꼬임”에 넘어가 공부를 하게 된다고. 저는 가르치는 순간엔 어쩐지 모든 학생에겐, 어른이든 아이든 ”애정”이 샘솟곤 해요. 제가 먼저 마음으로 보고 들으면 학생들이 결국 따라오게 되더라고요. 중학생들은 어떨 때는 수업이 끝났는데 한국어 수업을 더 계속 하고 싶다고 하곤 그래요. 중2병 프랑스 중학생들이 한국어 수업 덕분에 마음 잡았다는 프랑스 학부모들 감사 인사 듣기도 하고요. 플로베르 중학교에서는  복도를 지날 때 자주 한국어 수업이 아니라 스페인어나 독일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학생인데  , ‘’마담 임, 안녕하세요 ?’’ 라고 인사하는 학생도 있죠.


비결이 뭐에요 ? 

사실 모든 학생은 “이기적”이라서 좋은 성적을 받는 걸 좋아해요. 학생은 재미있고 자기에게 이득이 되면 잘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려면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공부가 즐겁고 부담 되지 않게 느껴져야 하는데, 뜻밖에 아주 작은 것들에 학생들은 재미있어하고 성취감을 느껴요. 그러면 더 잘하게 되고 더 좋아하게 되고요. 물론 반대인 날도 더 많지만요. 저 스스로가 행복한 선생이 되는 게 비결이랄까? 


선생님의 교육철학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 저는 교육은 “씨앗 돌보기”라고 생각해요. 학생들의 마음에 “씨앗” 하나 즉, 배우고 싶은 마음을 심어 주고, 그 씨앗이 잘 싹트고 자랄 수 있도록 밭도 갈아 주고 물도 주고 햇빛도 잘 비치게 해주고… 정성껏 그리고 “잘”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효과적으로 돌보며 그 씨앗이 자신 만의 꽃을 피워내리라 믿고 응원하며 지켜 봐주는 거죠. 물론 씨앗 잘 돌보기가 어렵고 힘들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요. 기대는 하지 않고 모든 씨앗의 잠재력을 믿고 각자 자신만의 꽃을 피우도록 사랑으로 지켜 보면 뜻밖의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되니까요. 사실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는 건 결국 각각의 씨앗 자신이고 모든 꽃은 자신만의 향기와 아름다움이 있잖아요. 교육 현장에선 그럴 깨닫고 실감하게 되는 일이 많이 있어서 행복해요. 그리고 ‘’배워서 남주자’’라고 말하고 싶은데요, 제게 가르치는 것은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거든요. 그럼 제가 더 풍요롭고 행복해지니까요.


선생님은 프랑스내 한국어 교육의 산증인이라고 할만해요. 그런데 이렇게 한국어가 프랑스 학교내에서 잘 자리잡도록 하시고는 왜 한국으로 가세요 ?

-무엇보다도 건강 상의 이유예요. 우선 몸과 마음을 쉬고 비우면서 건강을 회복하고 싶어요. 비워야 채워지고 그래야 나눌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까 말한 제 첫 번째, 두 번째 도전과 선택에 이어 이게 세 번째 도전과 선택이에요. 두 번의 선택 때마다 너무나 두렵고 힘들었지만 제 선택에 책임을 지고 도전해서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앞의 선택들이 다음의 선택들의 바탕이 되었고요. 그래서 이번에도 제가 여기에서 10년 동안 배우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나누기 위해 세 번째 선택을 하게 됐어요. 한국으로 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겨우 안정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왜 가냐고 하는데, 사람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원래 몸이 무척 약한 사람인데 열정이 넘쳐 해냈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이런 상태로라면 건강이 계속 악화되고,  그때가 되면 적당한 눌러 앉아 도전할 용기를 잃게 될 거 같아요. 그래서 쉬지 않으면 안되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지금, 더 늦기 전에 한국으로 가야겠다. 이렇게 결정했어요. 


한국으로 떠나시는데 아쉬운 점은 없으세요 ?

-무엇보다 아이 교육을 위해 프랑스에 왔는데 다행히 그 목표는 초과 달성한 것 같아요. 200% 만족해요. 아들이 프랑스 교육의 좋은 점은 다 누리면서, 자기 재능,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 소명까지 찾았고 무엇보다도 즐겁게 공부하고 행복해했거든요.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알을 깨고 스스로 나오도록 놓아 주고 믿고 지켜 보며 제 길을 가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한편 제가 소르본 대학에서 정말 훌륭하시고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시는 지도교수님도 만났는데도 박사논문을 마치지 못했다는게 부끄럽고 아쉬워요. 여기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 교사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한국에서 오래 해왔던 일이 그거라서, 현장에 놓이면 열정과 사명감이 생기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열심히 했고 많이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내적 충만감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어 교육 정착을 위해 여기저기 너무 뛰어다녀야 하다 보니… 정말 가르치는 일 자체에만 더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거, 그게 아쉬워요.  어쨌든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몫은 했다고 생각해요. 이젠 좀 더 젊은 세대들이 배워가면서 교육 현장에서 뛰면 좋을 거 같아요. 교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어요. 가장 큰 문제는 할수 있는 역량과 자질과 경험을 갖춘 교사가 부족하다는 거에요. 물론 훌륭하신 분들이 있는데 프랑스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고, 한국어 교사는 국어 교사하고는 다르니까요. 교사 양성에 기여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아쉽네요.


어릴때부터 교사, 가르치는 것이 혹시 꿈이셨는지요 ? 

-그랬던 것 같아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 꿈은 ‘’교육혁명’’이었어요. 사춘기 때 무엇보다도 교육 제도가 너무나 불만스러웠거든요. 그런데 방법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중2병이었죠. 그러려면 “힘”을 길러야겠고 힘을 기르려면 뭘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많이 읽다 보니 문학에 심취하게 되었죠. 그 후에도 가끔 그 꿈을 생각하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사실 제가 그 꿈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제가 결국 지난 25년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제 꿈의 길을 걸어왔다는 걸 프랑스에서 깨닫게 됐어요. 25년 동안 제가 가르친 또는 그냥 스치듯 만난 수많은 학생들, 학부모들 안에서 교육혁명의 길을 찾으려 애써왔다고 생각해요. 그들을 통해, 가르치면서 만나면서, 무엇보다도 실수와 좌절을 통해 제 안에서 스스로에 대해 크고 작은 교육혁명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남들이 보기에는 버젓한 자리도 없어 보이고, 제 자리를 잡았는데 한국으로 가는데요, 제 자신은 그때 품었던 생각대로 일관되게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 안에서의 교육 혁명이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고 생각해요.


이제 이곳 한국어 교육 현장을 떠나 한국으로 가시는데요, 앞으로 계획이나 하시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우선 쉬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고 “교육혁명”의 길을 계속 갈 거예요. 이번에도 “신의 한 수”였다고 말할 수 있도록 잘 쉬고 다시 열심히 해야죠. 물론 이제는 좀 다른 방법,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요. 구체적인 계획은 나중에 결과로 보여 드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프랑스의 한국어 교육 현장에서 뛸 후배 교사들에게 행복한 교사가 되라고 말하고 싶어요. 즐겁게 잘 가르치면 학생들도 그 시간만큼 행복하게 배울 수 있다고 믿어요. 좋아하면 잘하게 되고 잘하면 좋아하게 되잖아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의 능력과 열정 뿐만 아니라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겠지만요…


<파리광장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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