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시마 섬(군함도)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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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가사키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인‘하시마 섬’은 모습이 군함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군함도’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탄광촌으로196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며 호황을 이룬 섬이었지만, 1974년 석탄 광산이 폐광되고 버려진 후 단 한명의 사람도 거주하지 않는 유령의 섬이 되었다.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이자 관광 명소인 이 섬이 최근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일인 7월 5일(수)에 맞추어‘지옥의 섬’으로 불렸던 군함도의 역사를 바로 잡고 진실, 바로‘강제동원’이 있었던 숨겨진 사실을 알리기 위한 캠페인‘군함도를 기억해주세요’디지털 플래시몹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이 온라인을 통해 디지털 플래시몹에 참여하고 있다.
이 행사는 7월 26일 영화 « 군함도 » (감독 류승완, 배우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이정현 등)의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행사라 더욱 이목을 끈다. 영화 « 군함도 »는 일제강점기 수많은 조선인들의‘강제 징용’이 있었던 숨겨진 역사를 모티브로 류승완 감독이 새롭게 창조해낸 이야기다.
하시마섬 전체 모습↑: 행정구역상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시(구 다카시마 정)에 소속되어 있는 섬이다. 나가사키 반도 옆의, 관광지로 유명한 다카시마(高島) 섬 밑에 조그마한 섬이 2개 있다. 하나는 나카노시마(中ノ島) 섬이며 다른 하나가 바로 하시마(端島) 섬이다. 생긴 것 때문에 군함도(軍艦島, 군함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1960년대까지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치며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폐광 이후 주민들이 전부 떠나면서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하시마 섬(군함도)’은 19세기 석탄의 존재가 확인 되고, 대표적 전범기업인 미쓰비시가 1890년 사들여 해저탄광을 개발했다. 이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다. 탄광 안은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고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기도 하며, 작업 도중 해수가 갱내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하는 등 혹독한 자연환경과 노동조건 탓에‘감옥섬’,‘지옥섬’으로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일본은 하시마 탄광을‘일본 최초의 콘크리트 아파트가 들어선 일본 근대화를 뒷받침할 탄광’이라며 2015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15년 7월 5일 하시마섬(군함도)이 포함된 메이지(明治) 산업혁명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일본은 조선인의 강제 징용 사실은 지운 채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시킨 것이다. 이후 2017년 12월 1일까지 강제 노역을 인정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행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하시마 섬을 지옥섬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938년 하시마섬에서는 석탄 출탄량의 전성기를 맞았지만1941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시기와도 맞물려서 노동력이 부족한 때에 극심한 가뭄과 일제의 수탈, 징용에 불응하면 식량 배급을 끊겠다는 협박으로 조선 농촌에서 강제 동원이 시작된 것이다. 미쓰비시 중공업 소유의 하시마 섬은 6.3 헥타르의 면적 전체가 탄광촌으로 개발되어 최신식 아파트와 오락시설이 들어선 작지만 화려한 도시였다.
그러나 도시의 불빛 아래 깊은 해저 탄광에는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갱도의 끝 막장. 강제징용으로 온 한국의 젊은청년들은 해저 1000m에 이르는 곳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평균45도가 넘는 탄광에서철저한 감시와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돈 한푼 받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만 했다. 들이치는 바닷물에 피부가 짓물러 썩거나 메탄가스가 폭발하고 천장붕괴로 죽거나 다치는 일이 흔히 일어났다. 약속한 월급은 50엔이었지만 실제로 받은 월급은 8엔도 채 안되는 월급이었다. 이 마저도 남은 몇 푼은 일본 채권구입을 유도하여 돈을 벌어 돌아가거나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하시마 섬의 강제동원 피해자는 약 800여 명으로 추산되며 이들 중 1925년 부터 1945년까지 하시마 섬에서 사망한 이들은 공식집계 134명. 누락되거나 은폐된 사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 추정된다.
일본정부는 한국의 청년들은 자원해서 갔기 때문에 강제동원이 아니라 주장하고 있다. 하시마섬 등재 전까지 우리나라는 강제징용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선 안 된다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 이후 한국과 일본은 일본 근대산업시설에서 의사에 반한 강제노동이 있었음(‘forced to work’)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에 명시키로 하고, 이들 시설의 유산 등재에 합의했다. 하지만 등재 이후 바로 일본은‘forced to work’라고 말한 것은 강제노동의 의미는 아니라며 입장을 바꿔 논란을 일으켰다.
< 파리광장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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