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 '언제나 편견이 진실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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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재판에 섰다.
그는 빈민가에서 가난하게 태어났고, 9세 때 엄마가 죽고 아버지가 위조범으로 감옥에 간 후 고아원으로 갔으며, 10세에 선생님한테 돌을 던져 소년 법정에도 섰다. 15세 때는 차를 훔쳐 소년원에 들어가고 강도짓으로 체포된 전적이 있고, 18세가 된 소년은 어릴 때부터 상습적으로 폭행을 가하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현재 재판 진행중에 있다.
일급 살인죄에 대한 청문이 모두 끝났다. 검사는 치밀한 논리로 이 소년이 명백한 유죄임을 주장하였고, 소년의 이웃에 사는 두 주민 또한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에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함으로써 그 주장을 뒷받침 해주었다. 이제 이를 끝까지 지켜 본 12명의 배심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만이 남아있다.
12명의 이름 없는 사람들.
기상청에서는 오늘이 올 들어 가장 무더운 날이 될거라고 예보하였고, 배심원들은 모두 양복과 셔츠를 갖춰 입고 있다. 그들은 배심원실로 들어오자 마자 방 안에 꽉 차있는 더운 공기를 빼내기 위해 창문을 열고, 양복자켓을 벗고 ,정수기 물을 들이키는 등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를 식히느라 여념이 없다. 그러나 에어컨은 나오지 않으며 그나마 하나 있는 선풍기마저 작동하지 않는 통에 찜통같이 달아오른 방안에서 비오듯이 흘러내리는 땀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이들은 모두 오늘 이 일을 위해 처음 만난 사람들이며, 어떤 이는 배심원이 처음이고 어떤 이는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다. 어떤 이는 이런 명백한 사건을 갖고도 변호사들은 끊임없이 떠들어 댄다고, 그런 놈들은 말썽 피우기 전에 혼을 내줘야 한다고 하며, 어떤 이는 폭행이나 강도사건 재판은 정말 따분하다며 살인 사건이라 외려 다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보통 이름을 먼저 물어보기 마련인데, 그들은 어찌된 일인지 만나서도 서로 이름을 묻지 않는다. 대신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상대를 쉽고 빠르게 파악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상대의 이름은 별 의미가 없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갖고 있는 직업이나 일에 대한 경험과 주관을 바탕으로 상대를 파악하여 '난 당신 같은 부류의 사람을 잘 알고 있어.' 라고 쉽고 편리하게 판단한다. 그러나 직업이나 일은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정보일 뿐이다. 이러한 피상적 정보는 대상을 단순하게 만들고 한 사람의 고유한 모습과 성품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를 이 껍데기 정보와 평균적인 잣대로 스캔하듯이 쉽고 빠르게 파악한다.
이러한 모습은 배심원들이 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와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사건의 피고인 소년 자체의 개별성이 아닌, 그가 자라온 환경과 배경( 빈민가 출신, 좋지 못한 행실)과 타인이 준 정보( 검사의 주장과 두 증인의 증언)만으로 그가 아버지를 살해했을거라고 쉽고 빠르게 판단해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빨리 끝냅시다. 오늘 밤 8시에 야구경기가 있어요. 양키즈 대 클리블랜드.." 익명성과 개념화된 정보는 사람과 사건 모두를 쉽고 빠르게 처리한다. 그리하여 지금 소년의 목숨은 야구경기 티켓 1장보다도 가벼워진다.
배심원장은 서둘러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테이블로 불러모아 먼저 투표부터 하기로 한다. 일급 살인죄는 유죄 선고를 내리면 바로 사형이라는 것과 반드시 만장일치여야 함을 모두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킨다. 투표의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유죄 11: 무죄1로 나온다. 유죄에 표를 던진 사람들의 주장은 대체로 이러하다. '검사와 증인들의 논리가 명확한 반면, 소년은 유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점, 사건이 일어나던 시각 소년은 영화관에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영화 제목과 주인공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점, 소년의 살해 동기가 충분하다는 점 (평소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그날도 아버지와 싸웠다는 사실), 그리고 과거의 나쁜 행실 등.. 그러나 무죄를 주장한 이는 이들과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모르겠어요...그래요, 유죄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전부 유죄라고 하니 나까지 손을 들면 이 애는 그냥 죽게 될 것 아닙니까?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잖아요...이 애는 평생 학대받고 살았어요. 순탄한 삶은 아니었죠. 18년간 고달픈 인생을 보냈는데 몇 마디는 해야하지 않을까요?"
학대 받으며 살아온 순탄치 않은 삶, 고달픈 인생... 누구도 이 소년의 인생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 소년이라고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의 그도 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삶이 주는 절망과 고통으로 좌절을 겪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고난을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온갖 불만과 비난이 비처럼 쏟아질것을 알면서도 결국은 소년의 손을 잡고야 마는것이다. 영원히 연결되지 못할 수도 있는 타자에게로 다리를 놓는 이 정신적 행위는, 빈민가 출신의, 범죄 소굴에서 자라 잠재적 사회악일 수 있는 질 나쁘고 구제불능한 놈이라는 겉, 껍데기를 지나 가려져 있는 한 소년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다. 그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되고, 진지하게 그의 인생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굉장히 저돌적이고, 자신들이 정답을 갖고 있다고 믿는 이상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한 명이 반대죠."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군. 정말 무죄라고 생각하시오? 법정에서 우리와 같이 얼마나 위험한 녀석인지 들었잖소.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구요!"
단호한 자들은 세상을 흑 아니면 백으로 본다. 내가 백이니 나머지는 모두 흑이라고. 그러나 주인공은 지금 소년의 흑백을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단지 유죄가 아닐 가능성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그 '당연함'에 대한 불편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불편함은 사건을 좀 더 충분히 들여다 보자는 제안의 표현인 것이다.
'언제나 편견이 진실을 가린다.'
확신하는 자들이 자신들을 백이라 하고, 무죄를 주장한 이를 흑이라 한다해도, 세상엔 흑도 백도 아닌 회색과, 또 그 외의 수 없이 다양한 색들이 분명히 존재함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흑과 백 사이에 있는 이들은 자기 생각을 바깥으로 표현하는데 익숙치 않다. 그래서 뭔가 명확하지 않고 우유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도 처음엔 검사와 증인들의 말이 명백해 보여 유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한사람의 진지함으로 인해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 속에서 작은 불확실함을 하나씩 발견하는 것을 보면서 차츰 유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감하기 시작한다. 유죄의 확실함을 주장하던 강성들은 이것이 무슨 편가르기 게임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들의 의견이 점점 불리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하자, 이들을 배신자라고 조롱하며 그들의 우유부단함을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들의 독선에 상처를 입은 이들은 이러한 성급하고 과격한 편견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단면만으로 자신을 쉽고 거칠게 무시한 것처럼, 소년의 진실도 쉽게 무시할 수도 있을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리라. 그래서 '잘 알지 못하기에' 더 깊이, 그리고 더 천천히 사건과 소년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옳은 태도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영화는 불확실한 다수와 확실한 소수의 대결구도로 바뀐다. 소수의 극단적인 배심원들은 수세에 몰리게 되자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애초에 이들은 이성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확실한' 말에 스스로 '확실하게' 걸려 넘어짐으로써 자신들의 판단이 얼마나 불확실한 편견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었는지, 그리고 타인을 쉽게 판단해버림으로써 쉽게 상처를 주는 행위가 결국은 자신을 얼마나 공허하고 외롭게 만드는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결국 증인들의 증언들 또한 확실한 사실이 아닌, 그들의 '의견'일 뿐이었음을 확인하게 된 배심원들은 전원 무죄로 평결을 내리며 회의를 마친다. 법원을 떠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배심원이 주인공을 부른다.
"이름이 뭐요?"
"데이비스입니다."
"나는 맥카들이라고 하오, 잘 가시오."
우리는 영화 마지막에 와서야 주인공의 이름이 데이비스임을 알게 된다. 이름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하고 싶고, 그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로를 기억하면서 서로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질 때, 그제서야 비로소 새로운 관계는 시작된다.
<파리광장 / 박은진 penseur10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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