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문화,예술 분류

천경자, 꽃과 여인의 화가

작성자 정보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생전‘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며,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 화풍을 이뤘다고 평가받는 화가 천경자(본명 천옥자,1924-2015). 그는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출생했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재학 중 미술교사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1941년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일본화 고등과에서 사실적 데생법과 채색법을 수학했다. 이때부터 스스로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지어 사용했다.

한국미술사 속에서 여성 화가가 극히 드물던 시절 천경자는 여류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의 한계를 넘어 화가 천경자만의 독창적인 채색화 화풍을 개척한 미술사 속 입지전적인 인물 중 한명이다. 순수미술 화가였으나, 대중적 인기 또한 많았다.

천경자는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외할아버지를 그린 « 조부(祖父) », 1943년 외할머니를 그린 « 노부(老婦) » 라는 작품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입선하며 예술적 두각을 드러낸다. 1944년 일본에서 귀국 후 결혼했다. 이후 1946년 모교인 전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며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52년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서 « 생태 » 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35마리의 뱀이 한데 엉켜있는 그림으로,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소재와 구도로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라 한다. 당시 화단은 풍경이나 인물, 정물이 주를 이루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천경자는 일약 스타작가로 떠오른다 


ebb808f0727a6543351f100d3ef3ffce_1673631014_3976.jpg

천경자, « 생태 », 1951.

이렇게 세상에 이름을 알린 그는 1960~198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한다. 작업소재로 특히 꽃과 여인을 주로 그리면서꽃과 여인의 화가’라는 별칭이 붙었다. 여성이었던 작가가 선택한 소재로, 한편으론 진부한 느낌이 풍기는 일반적인 소재였지만, 꿈과 정한(情恨)을 일관된 주제로 삼았던 작가의 표현은 오히려 대범하고 독특하다. 긴 목과 짙은 눈 화장, 다양한 색채로 둘러쌓인 주변, 여인의 모습은 화려하지만 처연하다. 특히,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초점없는 눈동자의 표현은 강렬하면서도 슬퍼보여,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고정시킨다

ebb808f0727a6543351f100d3ef3ffce_1673631015_6048.jpg

            천경자, « 노오란 산책길 », 1983. 


천경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징은, 자화상이 아님에도 여인들의 모습이 화가 자신의 모습을 매우 닮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외국인 모델을 그린 작품 역시 화가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품 속 특유의 고독하고 몽환적이며 애틋한 눈빛의 여인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구성으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표출하였다. 1969년부터 약 30년간 남태평양,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인도 지역 등을 두루 여행하면서 이국적 인물화는 물론 풍물화 작업도 활발히 했다. 천경자는 한편 글재주도 뛰어나 다수의 수필집과 신문·잡지 기고글을 남겼다.

천경자 화백은1954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55년 대한미협전에서 작품 «  »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1년에는 국전(國展) 추천작가가 되었다. 1971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천경자미술연구소를 세웠으며, 1972년 베트남전 종군화가로 파견되었다. 1974년 홍익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1978년 대한민국예술원의 정회원이 되었다.


« 미인도 » 위작 논란과 절필, 그리고 미국 이주

1991년 천경자의 대표작 중 하나로 알려진 작품 « 미인도 »의 위작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작품을 직접 본 천경자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 미인도 »는 분명한 위작이라고 주장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리는 일이 발생했다. « 내가 낳지도 않은 자녀를 남들이 당신 자녀라고 윽박지르면 어떡하느냐 »는 그의 항변은 « 정신이 이상해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 » 라는 시선으로 되돌아왔다. 이에 환멸을 느낀 천경자는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 뒤, 1998«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 라는 말과 함께 작품 93(1940~1990년대에 걸쳐 제작)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8년 뒤 한 위조범의 자백으로 « 미인도 » 위작에 대한 논란이 재차 불거졌다. 하지만,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고, 감정 결과를 뒤집을만한 공신력 있는 기관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적극적인 수사를 하지 않았다. 이후 사건은 미해결된 상태로 오늘에까지 이른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경자 화백은2003년 뇌출혈로 쓰러지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2015 8월 뉴욕에서 사망했다. 사망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2개월 후이다.

지난 11 3,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다중스펙트럼 광학연구소(Lumiere Technology Multispectral Institute)’의 감정팀이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 주장되어온 « 미인도 »가 위작임을 판정했다(JTBC단독보도)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다음날인 4« 미인도 »가 천경자 화백의 진작이라고 주장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반박 보도 자료가 각 언론사에 배포되면서 « 미인도 »를 둘러싼 위작 논란은 결국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다시 혼란에 빠지는 듯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따르면, « 프랑스 감정단이 도출한 감정 결과는 종합적인 검증 등을 통한 결론이 아니라 부분적 내용을 침소봉대하는 것에 불과하다 » 는 것이다. « 심히 유감을 표명 »한 국립현대미술관의 대응에 귀추가 주목된다.


< 파리광장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3-01-21 16:25:14 문화 / 예술에서 복사 됨]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