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과 상드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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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와가 스케치한 쇼팽과 상드의 모습
작곡가 쇼팽 (1810-1849) 은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스무살이 되던 해인 1831년 프랑스로 건너와 그가 숨을 거둔 1849년까지 파리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쇼팽은 파리에 오자마자 상류층 인사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며 비교적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우아함과 정중함을 갖춘 쇼팽은 살롱에 드나들며 예술인들, 문학인들과 교류했고, 리스트, 드라크루아, 플레옐 등과 우정을 쌓았다. 남자 이름으로 개명하고 활동했던 작가 죠르주 상드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파리는 낭만주의가 한창이었다. 위고와 발자크가 문학계를 이끌었다면, 베흐리오즈, 로시니, 리스트가 음악계를, 드라크루아는 미술계를 이끌고 있었다. 쇼팽은 파리를 누비며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즐겼고, 그가 존경하던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쇼팽은 그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쇼팽이 파리에서 연 콘서트들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특히 리스트는 독창적이고 신선한 곡들을 쓰는 쇼팽의 재능을 높이 샀다. 드라크루아 역시 그를 진정한 예술가라고 칭하며 그에 대한 존경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1839년 쇼팽은 루이필립 왕에게 초대를 받고 왕과 그의 가족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게 되는데, 그는 이미 예술의 도시 파리를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쇼팽이 죠르쥬 상드(1804-1876)를 만난 것은 작곡가 리스트의 소개 덕분이었다. 서로에 대한 첫인상은 퍽 좋지 않았다. 쇼팽은 상드를 불쾌한 여자라고 표현하며 그녀가 과연 여자인지 의문이라고 친구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상드 역시 쇼팽의 여리여리한 면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고향 노앙(Nohant)에 머물던 상드는 파리를 재차 방문하며 쇼팽과 재회하게 되었고, 둘은 곧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상드는 알프레드 뮈세와 헤어진 후였고, 쇼팽도 전 연인과의 이별에 상심했 있던 터라 그 둘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애인사이라기 보다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로 보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할 것 같다. 쇼팽은 건강이 대단히 좋지 못했는데, 6살 연상이었던 상드는 그를 돌보며 보호자 역할을 도맡았다.
1938년 겨울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에 있는 마요르카 섬으로 함께 요양을 떠나기도 했는데, 상드의 지극 정성 덕분에 그는 어느정도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1839년부터 1846년까지 쇼팽은 상드의 고향인 노앙에서 머물며, 안정된 분위기에서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고, 폴로네이즈op. 53 « 영웅 » 과 바르카롤 op. 60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쓸 수 있었다.
모성애로 지탱해온 그들의 사랑은 9년간 지속되었다. 1847년 가정문제로 심하게 다투게 되었고, 그들은 결국 결별을 택하게 되었다. 재결합을 하기에 쇼팽과 상드는 이미 그들이 맺어온 관계에 질려 있었고, 서로에게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37살의 쇼팽은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1842년부터 나빠진 건강은 1948년 7개월에 걸친 영국 순회공연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마지막을 준비해야 했다. 임종을 맞이하는 그의 곁에는 많은 친구들이 모여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1949년 쇼팽은 39세의 나이로 페흐라쉐즈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유언에 따라 쇼팽의 심장은 그가 그토록 애틋하게 그리던 조국 폴란드로 보내졌다.
<파리광장 / 오솔잎, music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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