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에마뉴엘 마크롱 66.1%의 득표율로 대통령 당선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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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일요일 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중도우파 정당인 ‘앙마르슈En marche’의 에마뉴엘 마크롱이 66.1%의 득표율로, 극우정당인 국민전선당의 마린르펜(33.9% 득표율)을 이기고 프랑스 제 5공화국의 8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지난 4월 23일 있었던 대선 1차 투표에서 마크롱은 24,01%, 마린 르펜은 21,3%의 득표율로 결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2002년 대선 이후 프랑스에서 극우정당 후보가 또 다시 대선 결선에 나가게 되어, 지난 2주동안 프랑스 각계 각층은 극우파를 막기 위해 마크롱에게 표를 줄것을 호소하고 나섰고, 파리에서는 고등학생들까지 나서서 극우후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번 결과는 예상했던대로였고, 마린 르펜은 20시 투표 마감 이후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바로 패배를 인정하면서, 마크롱에서 전화를 해서 축하인사를 했고, 그의 성공을 기원했다고 밝혔다. 또한 국민전선당에게는 ‘’역사적이고 엄청난 결과 ‘’였음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그의 당을 깊이 개혁하겠다고 하면서, 6월에 있을 총선에서 이길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북동부 지역에서 극우 강세
지역별 득표 분포를 보자면, 실업률이 높고 임금이 낮은 지역에서 극우, 마린 르펜이 강세를 보였다. 특히 프랑스 북동부 지역, 엔 주에서 르펜은 52.9%의 득표율을 얻어 47.1%를 얻은 마크롱을 앞섰다. 또한 북부 지역인 파 드 칼레에서도 르펜이 52.1%의 득표율을 보였다. 르펜은 또 국민전선당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남동부 해안 일부 지역에서도 마크롱과 치열한 접전을 펼쳤으며, 마크롱은 주요 도시 지역에서 압도적인 표를 받았는데, 파리에서는 90%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마크롱,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 순간 진실을 이야기할 것’’
마크롱의 승리가 확정되자, 22시 30분경 마크롱은 15구에 있는 선거본부를 떠나 그의 무대가 펼쳐져 있는 루브르로 향했다. 그는 유럽찬가인, 베토벤의 ‘’승리의 찬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무대에 올라 그의 지지자들 수천명이 프랑스 삼색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자리에서 ‘프랑스가 승리했다’며 첫연설을 했다. 그는 생각이 같지 않은 이들도 그를 위해 표를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의하지 않은 생각들을 알고 있고, 그들을 존중할 것이고, 충실할 것이며, 공화국을 보호할 것이라고 했다. 마크롱은 또한 마린 르펜에게 표를 준 이들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그는 5년 동안 극우파에게 표를 줄 어떠한 이유도 없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는 과제가 쉽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매순간 진실을 이야기할 것이고, 시민들의 열정과 용기에 힘입을수 있을 것이며, 나라와 국민이 하나가 되기 위해 모으고, 화해할 것이라고 했다. 마크롱은 이날 모인 지지자들을 향해, 과반의 힘을 실어줄 것을 당부하면서, 혁명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 그리고 사랑으로 헌신할 것임을 약속했다.
에마뉴엘 마크롱, 그는 누구인가 ?
1977년 프랑스 지방인 아미앙Amiens에서 의사 부모에게서 태어난 마크롱은 전형적인 수재의 길을 걸었다. 파리의 명문 앙리 4세 고등학교를 나와 시앙스 포, 그리고 프랑스 역대 대통령들이 다닌 국립행정학교를 나왔다. 어린 시절의 마크롱은 할머니와 아주 가까왔는데 그는 검소한 지역의 중학교 교장이었다. 이같은 할머니의 영향이 자신을 좌파의 길로 이끌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바깔로레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으며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와 헤겔에 대해 공부하고 나서 1999년에서 2001년까지는 유명한 철학자인 폴 리케르Paul Ricœur의 조수로 있게 된다. 그는 철학을 아주 좋아했고, 이 시기 동안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언가 활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국립행정학교에서 금융 검사관 자격으로 졸업을 하게 되고,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일하게 된다. 여기서 마크롱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서 5년만에 90억 유로의 협상을 체결, 백만장자가 된다. 마크롱에게서 무엇보다 주목하는건 25살 연상의 아내다. 그랑제꼴 준비반이었을 때 마크롱은 친구에게, 젊은 여성들에게 관심이 가지 않는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아내, 브리지트는 이미 세 손주의 할머니이고, 이로써 마크롱은 젊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이렇듯 철학을 좋아하던 이가 어느날 갑자기 금융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2007년 현 프랑스 대통령인 올랑드를 만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마크롱은 올랑드의 대선 공약을 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2012년 올랑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금융업계를 떠나, 10배 정도 월급이 작은 엘리제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올랑드 대통령이 그에게 경제부 장관을 맡길때 마크롱의 나이 36세로, 프랑스에서는 최연소 장관이 되었다. 2016년 4월 마크롱은 회원 한 명 없는 정당인 En marche를 설립, 대권에 도전하게 된다. 이번 대선을 위한 좌파 경선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프랑스 5공화국의 최연소 대통령이 되었다.

많은 기권 및 백지 표로 지지 기반 강하지 못해
프랑스 정부는 결선 다음날인 5월 8일 월요일 공식집계를 발표했는데, 전체 투표 참여율은 74.56%였고, 기권은 25,44%로 1969년 이래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백지(혹은 무효) 투표를 한 사람들이 투표자 중 420만명, 즉12%에 이르는데, 이는 사상 최고 수치라고 한다. 프랑스는 한국 투표 용지처럼 여러 후보 이름이 적혀 있는게 아니라 투표 봉투에 한 후보의 이름이 있는 용지를 넣게 되어 있다. 기권자와 백지투표를 포함하면, 마크롱도 르펜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표한 사람은 전체 유권자의 1/3에 해당하고, 결국 전체 유권자 44%만이 그를 지지했고, 43%는 극우, 르펜을 막기 위한 차악의 결정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또한 극우, 마린 르펜은 33.9% 득표율로 졌지만, 1천 1백만 표가 르펜에게 간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2002년 대선에서 극우, 장 마리 르펜의 표는 5백5천만이었다. 이로써 마크롱의 권력기반은 처음부터 탄탄하다고 볼수는 없다. 6월초에 치러지는 총선을 통해 또다른 정치 구조의 개편이 이루질 것으로 보이는데, 여론 조사결과 마크롱 당에 절대 다수 의석을 몰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9%에 그쳤다. 앞으로 펼쳐질 마크롱의 5년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파리광장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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