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적 화가’호안 미로(Joan Miró,1893-1983)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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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 미로(Joan Miró)의 초현실주의는, 일반적으로 동시대 여타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여지던 다소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는 달리, 아주 밝고 경쾌하며 단순화되고 순수화된 형태와 색채의 조화에 의한 율동적인 구성이 특징이다. 이런 까닭에, 그가 그린 작품들은 문학적인 회화에 빠지지 않고 관람자들로 하여금 조형성(造形性)의 긴밀감을 엿보게 한다. 별, 여자, 새, 달 등을 거의 상형문자와 같이 환상화(幻想化)하여, 그것들을 조화시킨 화면은 어린아이가 놀이하듯 명쾌한 표현이 돋보인다.
반면, 폭력과 비극으로 점철된 스페인 내전과 제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그림속에 표현하기도 했다. 1937년 개최된 파리의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그가 그린 대벽화 « 수확하는 사람 » 에는 까딸루냐 농민의 분노를 암시하는듯한 격렬함을 엿볼 수 있다.
미로의 이러한 자발적이고 독자적인 성격에 대해 초현실주의 이론가이자 주창자인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 1896-1966 : 20세기 대표적인 프랑스 시인, 소설가, 초현실주의 이론가, 예술가) 자신이 주장했던 초현실주의 규칙들을 자유롭게 취사선택하는 미로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 아마도 우리 모두들 중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사람일 것 » 이라며 미로의 능력에 경외심을 보이며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Le Carnaval d’Arlequin, 1924
호안 미로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자, 1940년 가족과 함께 파리로부터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작품제작에 몰두한다. 그는 특히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호텔 벽화, 하버드 대학 벽화 등을 제작하며 미국의 전위운동(前衛運動)에도 기여하였다. 1948년 귀국한 이후 주로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왕래하면서 회화 ·판화 ·조각 ·도자기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독자성을 충분히 원숙시켜 195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전에서 판화대상을 받았다.
1956년 미로는 마요르카섬의 팔마에 아틀리에를 세워 옮기고, 1983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작업에 몰두하였다. 1958년L.아르티가스와 공동제작으로 파리의 유네스코본부에 도판벽화(陶板壁畵) « 낮 » 과 « 밤 » (Peintures murales du Soleil et de la Lune)을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세라믹 벽화 작업에 바치게 하여 발전된 그의 조형 언어로 흘러들어가게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 외 주요작품으로는 « 꿈그림 », «상상속의 풍경 », 뉴욕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 네덜란드의 실내 » 등이 있다.
호안 미로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그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등과 관계를 맺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나아가 미로 역시 이러한 다양한 예술사조의 중심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미로는 프랑스, 스페인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러시아 등 유럽과 미국을 넘나들며 국제적인 활동을 한 작가다. 그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 역시 놓쳐서는 안된다.
20세기의 다양한 미술 사조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창적 작업방식을 탐구한 작가로 요약되는 호안 미로, 그가 이토록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 방식을 지니며 각기 다른 미술 학파에서 영감을 얻을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우선, 그가 태어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라는 지역적 특성에 기인한 환경적 요인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은 한국과 같은 반도로, 아프리카에서 유럽을 향하는 첫 관문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이곳은 수백년에 걸쳐 다양한 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으며, 그 결과 서로 상반되는 문화와 인종이 한자리에 모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더불어 스페인은 제 1차 세계 대전(1914-1918) 당시 중립국이었다. 더불어, 항구 도시 바르셀로나에는 항구 도시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망명을 온 유럽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밤새 선술집에서 문화예술을 논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적 요소가 호안 미로의 전반적인 예술적 영감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직접적인 영향은 갈리(Francesc Galí) 아카데미에서의 수학을 꼽을 수 있다. 갈리 아카데미는 기존의 아카데믹한 교육보다는 실험적이며 서로 다른 예술 분야의 장벽을 부수고, 종합적이고 자율적인 예술인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학생들이 작업할 때 ‘시적’요소와 ‘음악적’요소를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미술학교의 혁신적인 분위기와 독특한 교육방식은 미로가 자유로운 정신 세계를 가지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떠한 특정한 학파로 분류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여러 미술 사조에서 영향을 받아 ‘미로만의 독창적 양식’을 추구했던 호안 미로는 마침내 모든 예술에서 받은 영감을 뛰어 넘어, 그 어느 것과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작업세계는 현대미술이 심리학과 철학 같은 동시대 사상과 연동하며 추상미술과 개념미술로 나아가는 과도기를 온전히 체현한 것이다.
< 파리광장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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