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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Egon Schiele) - 인간의 실존을 탐구한 직설적 표현주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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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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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표현주의적 화가다. 에곤 쉴레(Egon Schiele)1890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투른 출생. 1918년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불꽃 같이 짧고 격렬한 생을 마감했다. 쉴레의 나이 28세였다.

에곤 쉴레의 작업은 표현주의적인 격렬한 감정 표출 형태를 뛰어난 소묘력을 바탕으로 한 굵은 윤곽선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바로 이런 그의 작업적 특징은, 동시대 인간의 욕망과 본질에 대한 탐구라는 비슷한 주제로 작업했던 오스트리아의 또 한명의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 즉 지극히 장식적인 양식을 선호했던 클림트의 작업 방식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인간 본연의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고통스러운 투쟁에 관심을 기울이며, 의심과 불안에 싸인 인간의 육체를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로 거칠고 대담하게 묘사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성적인 욕망을 다루었지만 에로틱하기보다는 그로테스크 하며, 여성의 나체는 미적인 감상의 대상이기보다는 본능에 사로잡힌 인간의 동물적 광폭성을 표현한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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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 », 1915 : 이 작품은 쉴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에곤 쉴레는16세 때 빈 미술학교의 입학 허가를 받을 만큼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러나, 당시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학풍과 교수들과의 갈등으로 1909년 학교를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새롭게 등장한 아르누보 양식을 선호했고, 바로 이 시기에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만나 평생 친교를 맺으며, 그의 우아한 장식적 요소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08빈 분리파’* 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으며, 학교를 나온 후에는 몇몇 친구들과‘신예술가그룹’을 결성했다.

* 빈 분리파 : 1897년 당시 전통적인 보수 미술에 대항해,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결성된 조직이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초기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았던 쉴레는 클림트를 연상시키는 그래픽적이고 드라마틱한 양식을 선보였다. 그러나 점차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나 급진적인 표현주의자로서의 거칠고 대담한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다. 인간의 실존, 고통, 의심, 불안 등을 육체의 왜곡을 통해 표현한 그는 때때로 작품의 배경은 비워두어 고독과 단절감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쉴레는 회화가 진실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성()과 죽음에서 그 진실을 보았고 성과 죽음을 표현하여 구원에 이르고자 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그의 성과 죽음에 대한 묘사는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해 감상자로 하여금 오히려 생경한 인상을 준다. 쉴레에게 섹스는 죽음과 고통의 전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고통 받던 끝에 미치광이가 되어 죽었던 당시 그는 15세 사춘기 소년이었다. 20세기 초까지도 성욕은 죄악시 되던 시기, 학자들에 의해 매독과 자위행위가 광기의 원인임을과학적으로증명하던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한 쉴레에게 성이란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쉴레의 작품들 중 특히 여인과 소녀들을 모델로 한 누드화는 당시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 1912년 노이렝바흐(비엔나에서 약 35Km떨어진 마을)에서 미성년자 유인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은 그는 결국 24일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된다. 죄명은 부도덕과 꾐으로 모델로 섰던 가출 소녀가 그를 고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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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정, Friendship », 1913 


1913년 쉴레는 클림트가 이끄는‘오스트리아 예술가 동맹’의 회원이 되었으며, 빈 분리파 전시회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예술사회활동에 참여한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1915년 중산층 기독교 집안의 여성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결혼한 쉴레는 바로 군에 징집된다. 러시아 전쟁 포로를 호송하는 일에 배치되었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비교적 평탄하게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는 유럽의 주요 전시회에 여러 차례 참가하고 성공을 거두면서 재정적인 안정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의 작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1918년 클림트의 사망 이후 쉴레는 오스트리아를 이끄는 예술가의 지위에 올라서게 된다. 그해 3월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예술적으로, 경제적으로 클림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8년 가을, 불행하게도 유럽에서만 2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악명높은 스페인 독감으로 당시 임신 육 개월이었던 그의 아내가 사망한다. 그리고, 사흘 후 독감에 감염된 쉴레도 사망했다. 쉴레가 최후로 남긴 작품은 생애 마지막 사흘간 죽은 아내를 그린 초상화들이다.


< 파리광장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3-01-21 16:25:14 문화 / 예술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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