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아줌마 단상>, 20년전 유학생 시절의 프랑스 교수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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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인가 보다. 지천명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 한국 보다 프랑스에서 지낸 시간 더 많다는것을 알았을때 기분이 묘해졌다.
대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청운의 꿈을 품고 프랑스로 유학을 왔다.
그때만해도 비행기가 직항이 없어, 알래스카나, 방콕을 거치며 20여시간의 비행을 하며 왔고,
인터넷은 언감생심, 한국으로 편지 보내면 2주일이나 지나야 도착했고,
공화국인지 민주주의 국가인지 정확하게 표기하지 않으면 북한으로 날아갈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단순히 소문만은 아니었을듯하다. 그리고 당시에는 국제 전화 한번 하는게 큰 일이었다.
저 멀리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 그리고 왠지 큰소리로 이야기해야만 될것 같았던 이른바, 국제 전화였다.
인터넷으로 한국과 프랑스에서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수 있는 지금의 상황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타국 생활의 외로움은 더했고, 하루빨리 공부 마치고 내 나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파리 생활 5년이 지나면 파리 귀신이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유학생 선배들의 우스개 소리가 실현이 되어버려,
여기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강산이 두번이나 바뀌는 시간이 흘러 버렸다.
예전의 가졌던 꿈은 척박한 현실에 부딪혀 이미 포기한지 오래다.
그런 와중에 그 우연히 유학생 시절의 프랑스 지도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 문화원 보도 자료를 접하다가, 낯설지 않은 프랑스인 이름이 눈에 띈다.
다시 한번 되뇌여 보니, 예전에 파리 8대학 다니던 시절 지도 교수님이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반가웠다.
나를 지도 학생으로 받아주어, 한국을 떠나올수 있게 해준 교수님이었다.
당시 선생님이 보내준 편지의 깨알 같은 손글씨 필체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왔다.
초현실주의 문학을 하려다가 여성 문학쪽에 관심이 기울어 다른 교수님에게로 가겠다고 하니,
‘’그쪽에 관심이 있으면 당연히 그래야죠’’ 하며 쿨하게 대해주셨던 분이었다.
지금 문학평론가이자, 시 잡지 부편집장으로 소개되어 있다. 학교는 그만두신건가 싶었다.
20년 동안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많이 궁금했다. 당연히 행사에 가게 되었다.
유학생 시절 잠시 가졌던 학구열마저 다시 동하는듯했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단상위에 앉아 행사를 진행하는 교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20년 동안 구렛나루는 하얗게 새여져 있었다. 충분히 알아볼수 있었다.
다소 투박한 목소리로 꾸밈없이 빠르게 뱉어내는 말투는 여전했다.
사진을 몇장 찍고는 학생때처럼 노트를 펼쳐 필기하며 들었다. 물론 기사를 쓰기 위한 필기이기는 했다.
행사가 끝나고 인사를 드리러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 저, 8대학의 당신의 옛 학생이었어요 ‘’라고 하니,
‘’정말요 ?’’하며 무척 반긴다.
교수님이 나를 알아보기 만무였다. 중간에 교수님을 바꾸었다고 하니, ‘’내가 싫증이 났나봐요’’ 라고 한다. 함께 웃었다.
학업을 중간에 포기했고, 결혼을 하고, 지금은 교민지에 글을 쓰고 있고, 아이가 둘이라는 이야기에 ‘’잘했다’’ 하신다.
선생님은 은퇴한지 오래되셨다고 한다.
한국은 그동안 10번은 넘게 갔는데 한국어를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이들이 와서 잠시 떨어져 있는데 다시 나를 부른다.
한국시인과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통역 좀 하라고 한다. 그저 좋았다.
여러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고 계시길래 인사 없이 그냥 나왔다.
파리의 6월은 밤 9시가 되어도 환하다. 잠시 학구열을 불태웠던 젊은 시절로 돌아갔다왔다.
세월은 그렇게 흘렀고, 선생님의 하얀 구렛나루처럼 나의 얼굴에도 주름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삶은 또 다시 흘러가고 있다.
<파리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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