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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록 큰 롤계의 큰 별이 지다. 조니 할리데이 폐암으로 사망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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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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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리우던 록큰롤 가수, 조니 할리데이(Johnny Hallyday)125일과 6일 사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고 그의 부인, 레티시아가 밝혔다고 프랑스 언론은 전했다. 향년 74.

그의 본명은 쟝-필립 스메(Jean-Philippe Smet). 그는 지난 3월 폐암 진단을 받았고, 이를 그의 SNS를 통해 밝혔다.

조니 할리데이는 50여년 동안 가수 활동을 해온, 프랑스 록큰롤 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였다.

그는1960 3월에 ‘T'aimer follement’이란 곡을 발표하며 등장했다.  

1943615일 파리 9구에서 태어난 조니 할리데이는 외동 아들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아기일때 떠났다. 그래서 고모 손에서 자랐다고모는 발레리나여서 그를 공연장으로 데리고 다녔고, 거기서 그는 기타를 발견하고, 동시에 무용 수업을 받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사촌의 미국인 남편에게 리 할리데이(Lee Hallyday)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이때  미국 영화 ‘Loving You’에서 나온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면서 록 가수의 꿈을 꾸게 된다. 그때가 1957, 그는 곧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59년 라디오 방송인 "Paris-Cocktail" 에서 주목을 받고난 이후, 1960년 첫 앨범을 발표한다.

 

놀라운 판매 수치

그로부터 57년 후 그는 52개의 스튜디오 앨범, 29개의 라이브 앨범, 42개의 금박 디스크(2009년 이래로 오만장 판매), 25개의 백금 디스크(2009년 이래로 십만장 판매, 8개의 이중 백금 디스크(2009년 이래로 이십만장 판매), 3개의 삼중 백금 디스크(삼십만장 판매), 6개의 다이어몬드 디스크(오십만장 판매), 등을 발표했다

조니 할리데이는  프랑스 음악 산업 사상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를 한 이들 중 한명이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3천번의 공연을 했고, 2 9백만명의 관객들을 모았다.


음악에서는 성공했으나, 영화에서는 두각 나타내지 못해

조니 할리데이는 다른 가수들, 샤를르 아즈나부르(Charles Aznavour), 미셀 베르제(Michel Berger), 쟝 작크 골드만 (Jean-Jacques Goldman) 등과 함께 노래하면서, 음악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30여개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거기에 조니 ‘는 존재하지 않았다.


4번의 결혼과 4명의 자녀

1960년대에 스타가 되면서, 조니 할리데이는 군 복무로 인해 가수 경력이  잠시 묻혔다. 독일에서 군복무를 하고 1965년에 돌아와서 가수인, 실비 바르땅(Sylvie Vartan) 과 결혼하게 된다. 그들은 1963년 영화에 함께 출연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1966년에 현재 가수로 활동 중인 다비드 할리데이가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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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바르땅과의 힘든 결혼 생활을 마감하고, 조니는 1981년 배우, 바베뜨 (Babette)와 결혼하는데 이듬해 이혼을 한다. 이후 배우, 나탈리 베이에(Nathalie Baye)와 비교적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그들 사이에 딸, 로라가 1983년에 태어난다. 하지만 3년뒤 결별하게 된다.

1990년대에 그는 두 번 결혼한다. 한번은 배우, 아들린 브롱디오(Adeline Blondieau)1990년에서 1994년까지 결혼 생활을 이어갔고, 1996년에 모델이자, 조니보다 30살 어린  레티시아 부두(Læticia Boudou)와 결혼한다. 그리고 베트남 출신의 두 여자 아이를 입양한다.

레티시아 부두는 조니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삶을 위한 투쟁

암 진단을 받기 전, 조니 할리데이는 무절제한 삶을 살았다. 이미 그는 1998년에 밝힌 바 있다 : ‘코카인을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취했고, 지금은 일하기 위해, 기계를 재작동하기 위해 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하다. 그렇다.  그게 모두다라고 고백했다.

또 프랑스 시사 주간지 르포앵(Le Point)에서 밝혔다시피, 여러 차례 죽음에 직면했다가 피할수 있었다.  그의 측근은 항상 그의 건강 상태에 관한 진실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2012년 르피가로(Le Figaro) 지는 조니 할리데이의 건강을 위협한 에피소드들을 게재했다. 1966년 그는 실비 바르땅과의 결혼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리고 수차례 교통사고와 2012년 여름 동안의 응급실 입원 등, 조니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2009년 대장암 진단 이후, 3월 두번째 폐암까지 겹쳐 병마와 싸우고 있다고 스스로 발표하면서 안심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9 개월 후에 막대한 작품들과 수백만 명의 눈물 어린 팬을 남겨둔 채 떠났다.


국장은 아니지만  12 9일 토요일, 그의 장례식은 역사적으로 치루어져

127일 목요일,그의 장례식은 129일 토요일에 치루어질 것으로 발표되었고, 일간지 르파리지앵 (Le Parisien)은 장례행렬이 샹젤리제 거리를 거친 이후 마들렌 성당에서 장례식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무료 공연은 안전의 이유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샹젤리제 거리 운구 행렬은 조니의 부인인 레티시아의 요청이자, 1982년부터 2010년까지 조니의 프로듀서였던 쟝 클로드 까뮈 (Jean-Claude Camus)의 바램이라고 한다. 조니가 마지막 아듀를 대중들에게 할수 있는 기회라고 했다.

조니  할리데이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루어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24시간 차이로 먼저 떠난  프랑스 최고의 지성인 쟝 도르메송(Jean d’Ormesson)의 장례식이 8, 금요일 엠마뉴엘 마크롱 대통령에 의해 앵발리드에서 국장으로 치루어졌기에 두 사람을 한꺼번에 국장으로 할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조니의 측근이자, 코미디언인 뮤리엘 로뱅(Muriel Robin) 국장이기를 원했는데, 그가 나중에 떠났다는 이유로 국장이 될수 없는건 실수라고 했다. 또한 프랑소와즈 니센 (Françoise Nyssen) 프랑스 문화부 장관 또한 공식적으로 스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국장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파리에서는 생 로쉬 (Saint-Roch) 교회에서 목요일과 일요일 양일간, « 조니, 레티시아 그리고 그의 측근들을 위하여pour Johnny, pour Laeticia et ses proches » 라는 타이틀의 모임이 팬들을 위해 준비되었고, 8일 금요일 밤 내내 파리 시는 조니 할리데이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사진이 파리의 기념물 중 한 곳에 게시되기도 했다.   또 에펠 탑에는  « 고마워 조니 Merci Johnny. »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아이돌을 위한 레퀴엠

129일 토요일 그의 운구가 지나가는 샹젤리제 거리는 수많은 조니의 팬들이 아듀 Adieu를 위해 모였다.  이날 10시에는 « 아이돌을 위한 레퀴엠requiem pour une idole »이 가수의 시신이 있는 몽-발레리엔 (Mont-Valérien)의 장례식 장에서 시작되었는데, 프랑스 전역에서 온 700대의 오토바이가 파리 개선문을 거쳐 장례식이 열린 마들렌 성당까지 동행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온 수많은 조니의 팬들의 안전을 위해 프랑스 당국은 823 30분부터 다음날인 920시까지 도로 교통을 통제하고 안전 강화령을 내렸다.

경찰에 의하면, 1500명의 경찰과 헌병들이 동원되었고, 지하철, 마들렌 역과 콩코드 역은 토요일 아침에 폐쇄되었다.

조니의 장례식은 카톨릭으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마들렌 성당에서 있었다.  성당은 1100명만 수용할수 있어 대형 스크린과 티비로 장례식은 중계되었다. 프랑스 전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 내외, 프랑소와 올랑드 등이 참석했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1996년 눼이유Neuilly 시장으로 있을때 조니와 레티시아의 결혼을 선언한 바 있다. 그는 조니 할리데이에 대해  프랑스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큰 빈자리가 느껴진다고 했다.


팬들, 그의 노래에 위로를 받아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들렌 성당 앞에는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팬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눈물을 지으며 그의 노래를 불렀다. 슬픔에 겨워 오열하는 이, 흥겹게 박수를 치며 몸을 흔들며 노래 부르는 이들, 그리고 조니 할리데이의 머리 모양과 옷차림으로 있는 이, 그들은 젊은 학생부터 장년, 노년층까지 다양했다.

조니 할리데이의 노래는 프랑스인들의 삶에 큰 위안이 되었다. 어떤 팬은 삶의 힘든 시기를 지날 때 그의 노래가 도움이 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조니는 치유였다고 한다. 그의 공연을 보고 괴로움을 잊고, 그의 노래를 통해 치유를 받곤했다고 회상한다.  


부르타뉴, 로리앙(Lorient)의 생-바르테레미(Saint-Barthélemy) 섬에 묻히다.

조니 할리데이는 12 1115, 프랑스 부르타뉴 지방, 로리앙(Lorient)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생-바르테레미(Saint-Barthélemy) 섬의 묘지에 묻혔다. 파도와 바람의 소리에 들리며  바다를 마주보고있는 이곳은 조니가 그의 아내, 레티시아와 두 딸과 산책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의 팬들은 이미 묘지에 꽃들을 가져다 놓았고, 아마 록을 사랑하는 이들의 순례지가 될 것이라고 한다.  

묻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니 할리데이를 추모하고자 하는 생-바르테레미의 거주민들은 일요일, -쟝 장례지에서, 지역 전통이라고 할수 있는 추모 모임을 가졌다. 조니 할리데이 부부는 2008년 이 지역 고지대에 휴식을 위한 빌라를 지어 두 딸에게 제공했다. 

                                                                                                    

<파리광장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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