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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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13회에 걸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를 연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준 이재형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 생프리바달리에에서 모니스트롤달리에(19.5킬로) + 소그를 거쳐 소바주(19킬로)
□ 생프리바달리에에서 소그까지는 19.5킬로미터밖에 안 되지만 매우 힘든 코스다. 왜냐하면 생프리바달리에에서 저 아래로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모니스트롤달리에 마을까지 1킬로미터 정도를 내려갔다가 다시 1킬로미터 가량을 두세 시간 만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해야 하는 셈이다.
주민 수가 200여 명밖에 안 되는 모니스트롤달리에로 가려면 그다지 길지 않은 철교 하나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 이름이 바로 에펠(Eiffel)이다. 그렇다, 파리의 에펠탑을 건설한 그 귀스타브 에펠 씨가 운영하는 에펠 건축회사에서 세운 다리다.
알리에 강가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모니스트롤달리에에 있는 “순례자의 휴식처”라는 식당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힘을 내 저 위로 까마득하게 보이는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보자. 이 식당에서 파는 커피와 케이크는 정말 맛나다. 이 식당에서는 주변에서 수확한 각종 과일로 케이크를 만드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밤 케이크가 맛있었다.
소그에 도착하면 시에서 운영하는 숙소(gîte communal)에서 자고 식사는 시내에 있는 라테라스 식당(Restaurant la Terrasse)에서 하는 것이 좋다. 2019년에 생긴 지 100년을 맞은 이 식당은 이미 미슐랭 가이드북과 골트 & 미오 가이드북에 실렸다. 메뉴는 19유로부터 시작한다.
르퓌 순례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백년전쟁의 흔적을 보게 된다. 그만큼 이 전쟁이 프랑스 전역에서 오랜 기간 계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소그에는 ‘영국인들의 탑’이 있다. 1360년, 백년전쟁을 벌이던 프랑스와 영국이 브레티니 조약을 맺자 영국군 측에서 싸웠던 용병들의 계약이 종료되었다. 그러자 ‘영국인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사병(私兵)이 되어 약탈과 강도질을 일삼던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그의 지배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들이 살던 사각형 탑을 ‘영국인들의 탑’이라고 불렀다.
왕립군은 이들을 쫓아낼 수가 없어서 결국은 물러나는 조건으로 금을 주어야만 했다. 돌출회랑이 설치되어 있고 총안이 뚫려 있는 이 사각형 탑은12세기 군사 건축물의 좋은 예다. 백년전쟁은 중세시대가 끝나갈 무렵 프랑스와 영국 간에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 왕이 프랑스 왕위를 요구한 1337년에 시작되어 프랑스가 승리를 거둔 1453년에 끝났다. 따라서 1세기가 넘게 계속되었지만, 중간 중간 소강상태를 보였으므로 실제로는 100년이 채 안 된다.
그렇다면 백년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 14세기 초에 프랑스왕국은 왕위 계승 문제로 위기를 맞았다. 미남 필리프 4세 왕의 세 아들이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죽은 것이었다. 그래서 필리프 4세 왕의 조카이자 이전 왕들의 사촌인 필리프 드 발루아가 프랑스 대영주들에게 지명되어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그는 발루아 카페 왕조를 세웠다.
필리프 4세의 딸인 이자벨은 남자 형제들이 죽었지만 여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금한 살라카 법에 따라 후계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녀는 영국 왕과 결혼하여 에드워드 3세를 낳았다. 에드워드 3세는 자기가 필리프 4세 왕의 손자이며 이전 왕들의 사촌이기 때문에 프랑스 왕이 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필리프 드 발루아의 권위에 도전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영국 왕은 또한 그의 기엔(프랑스의 남서부 지역) 봉토에서 프랑스 왕의 봉신이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프랑스 왕의 대리인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서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에드워드 3세가 도발하자1337년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기엔 공작령을 점령했다. 이것이 백년전쟁의 발단이다.
백년전쟁은 크게 프랑스의 패배로 요약되는 제 1기, 프랑스 왕 샤를 5세가 프랑스를 다시 정복하는 제 2기, 프랑스 왕국이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는 제 3기, 프랑스 왕이 승리를 거두는 제 4기로 나뉜다.
이 백년전쟁 때 등장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잔 다르크다. 1428년, 영국인들은 샤를 7세에게 호의적이며 루아르 강의 통행을 장악하고 있는 도시 오를레앙을 포위 공격했다. 로렌 지방에 살던 어린 소녀 잔 다르크는 쉬농 성에 머물고 있던 왕을 찾아와 자신에게 군사를 내어주도록 설득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켰다. 영국인들은 북쪽으로 물러났고, 왕은 1429년 7월 17일 랭스에서 축성받았다. 공식적으로 샤를 7세가 된 것이다. 잔 다르크는 파리를 뺏으려 애썼으나 격퇴당했고, 결국 콩피에뉴에서 부르기뇽 파에게 붙잡혔다. 부르기뇽 파에 의해 영국인들에게 넘겨진 그녀는 1431년 5월 29일 루앙에서 화형당했다.샤를 7세는 군대를 재조직하여 결국 파리(1436년)와 노르망디지방(1450년), 기엔 지방(1453년)을 차례로 탈환했고, 영국인들에게는 칼레만 남았다.
파리의 로댕 미술관 정원에 전시되어 있는 칼레의 시민들〉백년전쟁 당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온몸으로 실천한 칼레의 시민들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이다. 1346년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로 건너온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영토를 유린하다가 칼레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칼레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장 빠른 시간에 건너갈 수 있는 항구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칼레 시민들은 11개월을 버티다가 식량이 다 떨어지자 결국 영국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기로 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 조건을 타진해 왔다.칼레 시민들이 오랫동안 성문을 열지 않고 버티자 지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던 에드워드 3세는 칼레에서 가장 부유한 시민 여섯 명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를 비롯한 여섯 명의 칼레 시민은 에드워드 3세가 요구한 대로 셔츠 차림에 목에는 밧줄을 걸고 손에 성문 열쇠를 든 채 맨발로 그의 앞에 나아갔다.
1884년 로댕은 칼레 시로부터 자기희생과 애국심, 영웅적 행위의 상징인 이 여섯 시민을 불멸의 예술작품으로 남겨달라는 부탁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1889년 완성했다. 그 후로 1995년까지 합법적인 청동 복제품이 12회까지 주조되어 칼레 시청 앞 광장과 영국 의회 정원, 코펜하겐 미술관 등 세계 곳곳에 전시되어 있고, 마지막 열두 번째 작품을 서울의 삼성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 소그에서 소바주까지는 19킬로미터에 불과하며 길도 평탄하다.
소그에서 소바주로 가는 길에는 샤조(Chazeau)라는 작은 마을이 있고, 이 마을에 “제롬네(Chez JerÔme)”라는 카페가 있다. 그런데 말이 카페지 사실은 그냥 동네 주민의 집이다. 여기서는 여러 종류의 파이와 케이크, 커피, 집에서 만든 소시지 등을 판매한다. 주인 이름이 제롬이다. 르퓌 순례길을 처음 걸었을 때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 시골 마을이 거의 대부분 그렇듯, 제롬도 10대 후반, 20대 초반에는 단조롭고 따분하기만 한 시골 생활이 싫어 도시로 나가 오랫동안 방황했다. 그러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루어 지금은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9월에 르퓌 순례길을 걷다 보면 길 양쪽이 온통 산딸기 밭인데, 이것만 따먹고 걸어도 그다지 허기지지는 않는다. 제롬은 자기만 아는 장소를 찾아가 크고 당도 높은 산딸기를 채취하여 파이를 만든다고 했다.
소그에서 출발하여 소바주로 갈 때 통과하는 숲은 거의 대부분 추위와 가뭄에 매우 강한 유럽 적송으로 조림되어 있다. 나무들이 곧게 뻗어 있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 지역의 소나무는 바람이 많이 불고 얼음처럼 차가운 이곳의 겨울 날씨에 적응하다 보니 마디가 많고 발육이 좋지 않다. 그러나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 살 수 있다. 이 소나무에서 짜내는 식물성 기름은 목이 아플 때 좋고, 송진은 전통적인 도료를 만들 때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자생종은 너도밤나무인데, 오브락에 도착할 때까지 자주 보게 된다. 너도밤나무는 매우 느리게 자라는 나무이지만, 옛날 이곳 주민들은 이 나무 덕분에 결혼식 등 큰 행사를 치르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소바주는 해발 1300미터의 깊은 숲속에 자리 잡은 750헥타르의 농지를 말한다. 소그에서 걸어서 4시간 반 정도면 도착한다.
르퓌 순례길을 걷다 보면 숙소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해야 하는데, 이 길을 여러 차례 걷고 나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숙소들이 있다. 소바주는 그중 하나다. 불어로 ‘Sauvage’는 야생적이라는 뜻인데, 이곳 분위기는 이러한 의미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곳의 황량한 풍경은 순례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식당은 4월 1일부터 11월 1일까지만 문을 열지만, 숙소는 1년 내내 열려 있다. 식당에서 사용하는 식재료는 모두 이곳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생산한 것이어서 매우 싱싱하고, 처음 보는 메뉴도 많다. 숙소도 매우 청결하다.
1222년 르퓌에 있는 자선병원의 참사원들이 이 소바주 영지를 매입했다. 소바주 영지는 수익성이 있는 경작지로서 여러 세기 동안 본원에 현금 수익을 정기적으로 안겨주었고, 소와 돼지·치즈·빵 등 자연에서 나오는 부산물도 제공해 주었다. 르퓌 순례길의 전성기는 14세기로, 당시에는 100만 명이나 되는 순례자가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1816년, 자선병원 측은 소바주 영지를 매각했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끝에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자크 시라크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이 가문은 소바주 영지를 154년 동안 지켰고, 1976년에 오트루아르 도는 소바주 영지를 매입해 직접 관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소바주 영지를 경제적으로 발전시키고 관광 사업도 벌이는 한편 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일자리도 창출해낸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다. 그리하여 오트루아르도의 농업위원회는 인근 농민들에게 이를 위한 프로젝트를 수립해보라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여러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의욕적이며 실현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가 선정되어 2010년 유한책임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30여 명의 농민이 이곳에 와서 숙소와 식당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각자 가능한 시간을 선택하고 순번을 정해 이곳에서 일을 한다. 하지만 누가 되었든지 간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두 가지 의무 조항이 있다. 한 가지는 한 달에 최소한 1주의 일요일에는 여기 와서 일을 하며 동료들이나 고객들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농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요리사와 종업원을 채용했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농사일도 해야 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1년 중 몇 달은 그들의 성년이 된 아이들과 몇몇 젊은이들을 고용하기도 한다. 일자리로 말하자면, 이 소바주 영지에서는 일곱 명이 1년 내내 일하는 것과 맞먹는 일자리를 창출해냈는데, 이 외딴 산골에서 일곱 명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이 농민들은 고기와 치즈, 채소, 잼, 버섯, 과일 등 모든 식재료를 그들의 농가에서 생산하는 것만 사용한다.
-계속 이어집니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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