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순례길 연재 (2) 르퓌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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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13회에 걸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를 연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준 이재형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르퓌 순례길의 출발 도시 르퓌에 도착한 순례자는 순례자 카드도 구입해야 하고 순례자를 위한 미사와 축성식(4월 1일부터 10월 31일 사이에는 매일 아침 7시, 그 밖의 기간에는 월요일에서 금요일 사이에 아침 7시 30분)에도 참석해야 하므로 반드시 르퓌 노트르담 성당에 들르게 된다 중세 초기, 이 노트르담 성당에는 동방에서 가져온 신비로운 검은색 마리아 목상(木像)이 있어서 이미 5세기 때부터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야고보 성인의 묘지가 발견되고 나서 1세기가 채 지나지 않은 950년 르퓌의 고데스칼크 주교와 수행원들은 성모마리아를 숭배하는 이 도시에서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까지 멀고도 먼 여행을 떠났다. 고데스칼크 주교는 산티아고까지 간 프랑스의 첫 순례자로 알려져 있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온 고데스칼크는 미셸 데길레 성인을 모시는 예배당을 세웠다. 그러자 이 도시에는 프랑스뿐 아니라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나라의 순례자들까지 몰려들어 성모마리아 상을 경배한 다음 산티아고를 향해 떠났다. 성당 건물은 점점 늘어나는 순례자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11세기와 12세기에 증축되었고, 수도원이 성당 건물과 등을 맞대고 건설되었다. 순례자는 르퓌 노트르담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 102개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이 계단은 성당 정문 아래를 지나 중앙 홀로 이어지는데, 점점 더 좁아진다. 이처럼 이상하게 공간이 배치된 것은 지형이 경사져 있고 대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엄청나게 많은 순례자가 밀려들자 성당을 넓혀야만 했다. 하지만 뾰족한 바위산에는 자리가 더 없었으므로 건축가들은 세 번째와 네 번째 트라베(travée)를 지탱하기 위해 말하자면 허공에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황금문’이라 불리는 문을 열고 열일곱 계단을 다시 올라가면 중앙 홀로 들어갈 수 있다. 순례자는 검은색 마리아 상을 모신 제단 앞에서 미사를 드린다. 원래 마리아 상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면서 불에 타버렸고, 지금 제단에 모셔져 있는 검은 마리아 상은 1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다른 예배당에 있던 것을 1856년에 이곳으로 가져왔다.
르퓌에는 또 하나의 마리아 상이 있다. ‘프랑스의 마리아 상’이라고 불리는 이 청동 마리아 상은 해발 132미터의 바위산 꼭대기에 16미터 높이로 서 있어서 르퓌 어디에서나 잘 보인다. 프랑스군이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여 공격할 때 노획한 대포를 녹여 만든 이 동상은 1860년에 완성되었으며, 1886년에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에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동상이었다
자, 이제 순례자는 르퓌를 떠나 블레이 지방의 화산지대와 마르즈리드 지방의 화강암질 산괴, 오브락 고원, 로트 지방의 계곡, 케르시 지방의 석회질 고원, 가스코뉴 지방의 작은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피레네 산맥을 멀리 바라보고 걸으며 생장피에드포르에 도착하여 르퓌 순례길의 여정을 마치게 될 것이다.
■ 렌틸콩
순례자는 르퓌에서, 혹은 르퓌를 출발하여 하루 이틀 내에 초록색 렌틸콩으로 만든 요리를 먹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르퓌는 꼬투리 안에 양면이 볼록한 렌즈 모양의 콩 두 개가 들어 있어서 렌즈콩이라고도 불리는 이 콩의 주산지이기 때문이다. 지방은 적고 단백질이 풍부해 세계 5대 슈퍼 푸드 중 하나라고도 하니 넉넉하게 먹어 둘 일이다.
수프나 죽, 스튜로 끓여 먹기도 하고, 소시지나 연어 요리에 곁들이기도 하며, 밥에 넣어도 좋다. 나는 르퓌를 출발해 대부분의 순례자가 26킬로미터를 걸어 첫날 숙소로 정하는 생프리바달리에에서 4킬로미터를 더 간 로슈기드라는 마을의 한 숙소에서 그 숙소를 운영하는 가족들과 함께 렌틸콩을 곁들인 소시지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르퓌에서 르퓌 초록 렌틸콩을 얹은 타타르식 연어 스테이크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다. 이게 무슨 요리인가 하면, 생연어에 갖은 양념을 하고 둥글게 말아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르퓌 렌틸콩을 익혀 얹고(콩 위에 연어를 얹기도 한다) 타타르 소스를 뿌린 요리다. 세 번째로는 르퓌 순례길이 아닌 스티븐슨의 당나귀 길을 걷다가 르퓌 렌틸콩으로 만든 수프를 먹어보았다. 그날 길을 잃어 40킬로미터 넘게 걷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밤늦게 숙소에 들어선 내게 주인장은 이 수프를 내놓았다.
이 따뜻한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집어넣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순식간에 행복해졌다. 마법의 렌틸콩 수프였다. 이 렌틸콩은 ‘가난한 자들의 캐비어’라고도 불린다. 영양가가 높으면서도 값이 싸기 때문이다. 콩류에서 이 만한 건 없다. 이 콩의 가장 큰 장점은 크기다. 지름이 4~5밀리미터밖에 안 될 만큼 매우 작고, 표피가 강한 풍미를 풍긴다. 표피가 매우 얇고 전분을 거의 함유하지 않기 때문에 단시간에 삶을 수 있어 식감이 찰지고 소화도 잘 된다. 초록색 렌틸콩을 삶으면 갈색으로 변한다.
르퓌가 자리 잡은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갈로로망 유적지를 발굴한 결과 렌틸콩은 2000년 전부터 재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콩이 이렇게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재배된 것은 아마도 이곳화산지형의 여러 가지 자연적 요소가 결합하면서 독특한 재배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르퓌 주변에서는 1000명가량 되는 농민들이 약 3900헥타르의 땅에서 아니시아라고 불리는 이 옛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
이 콩을 파종하기 좋은 시기는 땅의 온도가 5도 이상 되는 3, 4월이다.해발 600미터에서 1200미터 사이에 위치한 재배지의 토양에는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 르퓌의 초록색 렌틸콩은 거의 대부분매우 비옥한 화산성 토양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공기 중의 질소만 섭취해도 잘 자란다. 그렇기 때문에 화산성 토양과 소기후가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어서 재배 지역이 르퓌 남서쪽의 캉탈 지방과 마르즈리드 산악지대, 르퓌 남동쪽의 오비바레 지방으로 한정되어 있다.
여름이 되어 일조량이 풍부해지고 덥고 건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르퓌의 초록색 렌틸콩은 본격적으로 익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지역은 기후가 지나칠 정도로 건조하지는 않기 때문에 렌틸콩의 전분 함유도가 낮아서 표피가 적당하게 부드러워진다. 이 콩의 수확기는 7월 말에서 9월 초 사이다. 이 콩을 넣고 밥을 할 때는 굳이 미리 물에 담가놓을 필요가 없고 바로 쌀 위에 얹으면 된다. 로슈귀드 숙소의 주인장 말에 따르면 콩과 같은 양의 물을 넣고 25분 삶으면 다 익는다.
■ 길 위에서 만난 사람
순례길은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서로가 순례자라는 것을 알자마자 곧장 허물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 아마도 같은 목표를 갖고 걷는다는 사실 자체가 서먹함을 없애주는 것 같다. 상대의 직업도, 나이도 묻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길을 함께 걷는다는 사실 뿐이다. 다섯 차례에 걸쳐 르퓌 순례길을 걸으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들 중에서 첫 번째는 클로드다. 그는 예순세 살(2010년 당시) 은퇴자다. 그리고 아비뇽에 산다.르 퓌에서 출발해 첫날, 나는 깜빡 표지판을 잘못 읽어 길을 잃는 바람에 10킬로미터 이상을 더 걸었다. 게다가 점심도 못 먹어 배가 주릴 대로 주린 상태로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 주인은 나를 기다리다 퇴근해버렸다.
그때 그 덩그런 숙소에서 나를 기다려 주던 순례자가 바로 그다. 그는 걱정과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나를 맞았다. 그리고 함께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는 동안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처음 보는 이방인인 내게 털어놓았다.
이제 은퇴한 그는 아비뇽에 아파트를 사서 혼자 산다. 그는 얼마 전 이사한 아파트에 짐도 다 풀지 않고 순례를 떠나왔다. 프랑스에서 흔히 제3의 나이라고 부르는 은퇴기를 자축하기 위해서다. 식사가 끝나고 함께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내 배낭과 신발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내가 꼭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초등학생처럼 작은 배낭을 들고 조깅용 신발을 신고 갔기 때문이다. 그는 이윽고 자기 배낭을 뒤지더니 오르막길에 대비한 근육강화제라든지 초콜릿, 건강보조식품 등 나는 생전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을 이것저것 내놓았다.
그리고 방에서 나가더니 다른 순례자들이 버리고 간 등산화도 하나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내 신발로는 눈 쌓인 오브락 고원을 넘기 힘들 거라고 말하면서 등산화를 건넸다. 나중에 나는 무릎까지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두껍게 쌓인 오브락 고원을 혼자 낑낑대고 걸으며 그에게 무진 감사했다. 순례길을 걷는 그는 온갖 삶의 무게에서 벗어난 듯 발걸음도 가볍고 홀가분해 보였다. 어쩌면 순례는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 우리는 만났다 헤어지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삶이 그렇듯 순례도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시종일관 나를‘내 한국인 동생’이라고 불렀다. 나도 그가 프랑스 형처럼 여겨졌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르퓌 길 순례를 마쳤을 때 그는 내 옆에 없었다. 내심 서운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스페인의 프랑스 길을 걷는 그가 무사히 여행을 마치기를 기원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함께 길을 걷는 한국인 청년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청년은 클로드와 함께 걷고 있다며 클로드가 내 소식을 궁금해 한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클로드와 통화하는 동안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된 것이다. 그는 두 달 넘게 걸리는 순례를 마치고 6월 초에 아비뇽으로 돌아가 은퇴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했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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