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 (10)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2 댓글
- 5 추천
- 목록
본문
본지는 13회에 걸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를 연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준 이재형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 카오르에서 몽퀴크, 몽퀴크에서 무아사크까지(66킬로, 3일). 카오르에서 몽퀴크까지는 31킬로미터지만 계속해서 평지를 걷게 되므로 힘든 코스는 아니다. 하지만 몽퀴크에서 무아사크까지는 35킬로미터. 길기도 길지만, 몽퀴크에서 14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로제르트 마을이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올라가려면 매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산 밑에 있는 오렐리라는 뷔페식당에서 일단 든든히 채운 다음 힘을 내어 등산을 시작하곤 했다.
○ 로제르트 마을에서 운영하는 숙소 Gîte communal de Lauzerte에서 하룻밤 묵으며 고즈넉한 로제르트의 밤풍경 속을 걸어보라.
○ 12세기에 세워진 생세르냉(St. Sernin) 예배당은 옆에 있는 묘지와 함께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 자원봉사자들이 조금씩 보수하고 있다. 묘지에는1879년 열네 살 때 너무 일찍 세상을 뜬 마리가브리엘의 무덤이 있는데, 그녀의 여자 형제들이 그녀를 기리며 돌에 새겨 넣은 시를 읽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는 이 어린 영혼이 위로받을까 싶어 예배당의 종을 울린다.
-마치 안동의 하회마을처럼 강물이 도시를 한 바퀴 휘감아 흐르는
도시, 카오르에 도착하면, 나는 프랑스의 위대한 정치가 한 사람을 생각한다.
바로 《뤼마니테》신문을 창간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한 장 조레스(Jean Jaurès, 1859~1914)다. 장 조레스는 레옹 강베타의 정치철학을 이어받아 현실정치에서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단순히 박사 학위를 가진 철학자였을뿐 아니라 카리스마를 갖춘 웅변가로서 사회주의 이념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혁명가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정치인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1904년 4월 18일에 일간지 《뤼마니테》 창간호를 냈고, 그가 죽을 때까지 끌어갔다. 조레스는 국회의원으로서 종교색을 없앤 교육과 노동자의 상황을 개선하는 법안들을 마련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열렬한 반 反자본주의자에 뼛속까지 평화주의자였다. 조레스는 프랑스가 공화민주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서서히 넘어가게 만든 개혁을 지지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에는 반대했다. 유럽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1913년 5월, 조레스는 파리 북동쪽의 생제르베 언덕에서 열린 반전 집회에서 15만 명의 군중을 향해 평화를 외쳤다. 전쟁의 위기가 목전에 다가왔을 때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대한 전 유럽 차원의 반대 운동을 벌이려고 애썼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된 것을 시작으로 사흘 뒤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같은 해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와중에서 조레스는 1914년 7월 31일 밤 9시 40분, 파리의 뤼마니테 신문사 근처에 있는 크루아상 카페에서 민족주의를 추종하는 대학생 라울빌렝에게 살해되었다.
-로제르트 마을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순례자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중세 마을은 이미 11세기부터 이 뾰족한 산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목재 골조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정면, 창살대가 있는 창문 등, 백 白케르시아 지방 특유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집들이 서로 몸을 바싹 붙이고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이 마을에 있는 집들의 2층이 1층보다 앞으로 튀어나오고, 드물게는 3층이 2층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비가 들이치면 건물의 아랫부분과 입구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기술적 선택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집 평수를 늘리면서도 세금은 줄이기 위한 꼼수이기도 하다. 중세에는 세금이 건물의 1층 면적에 따라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로제르트를 떠나 두세 시간쯤 걷다 보면 뒤르포르라카플레트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 무아사크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부분 정남쪽을 향하고 있는 완만한 언덕에 조성된 포도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타른 강과 가론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 잡은 무아사크는 두 가지 이유에서 예부터 명성을 누려왔다. 하나는 1100년에 완성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거대한 수도원이고, 또 하나는 샤슬라(chasselas)라는 품종의 먹는 포도다.
다 익으면 투명한 황금색을 띠고 달면서도 살짝 시큼한 맛이 나는 이 품종은 원래 근동 지방에서 들여왔다. 프랑스에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포도주를 만들었던 이 포도의 재배 기술을 발달시킨 것은 무아사크의 생피에르 수도원 수도사들이었다.
그런데 왠지 술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수도사들이 왜 포도주를 만들었을까?
포도주는 미사에도 쓰이고, 과객(주로 순례자들)을 맞아 재워 주고 식사를 대접할 때도 쓰이는(중세 때는 발효된 음료가 대부분 오염된 물보다 훨씬 위생적이었다. 그래서 수도사들이 자기들도 마시고 순례자들에게도 내놓을 겸 포도주를 생산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탈리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 Paolo Veronese의 〈카나의 혼례〉라는 그림을 보자.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같은 전시실에 걸려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이 그림의 오른쪽 아래를 보면, 노란색 옷을 입은 하인이 항아리를 기울이고 있다. 카나라는 마을에서 벌어진 결혼 피로연에서 마시던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자 예수는 물을 가져오라 하여 포도주로 바꾼다. 이것은 예수가 행한 최초의 기적이다.
포도주는 기적의 음료인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독교 음료다. 그러니 로마가 프랑스를 점령했던 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포도밭이 야만족들에게 파괴된 이후에 다시 포도 재배가 시작되고 포도 재배 기술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왜 수도사들이 큰 역할을 했는지 이해될 것이다. 좋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수도사들은 자신의 근육과 오감(五感), 두뇌를 동원해야 하고 애정을 쏟아야 한다. 그것은 또한 신을 찬양하는 것이며,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곧 절대자를 향해 가는 길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샤슬라 포도는 1845년에만 4만 킬로그램이 마차에 실려 파리로 팔려나갔고, 1858년에 기차가 무아사크를 지나가게 되자 무려 그 5배나 되는 양이 파리로 실려 갔다. 하지만 포도나무 진딧병이 돌아 포도나무를 다 뽑아내고 다시 심어야 했다. 그 뒤로 무아사크의 샤슬라는 먹는 포도의 대명사가 됐고, 1977년에는 AOC 라벨을 획득하여 품질을 인정받게 되었다.
샤슬라 포도나무는 이 라벨 규정에 따라 심어야 하고, 오직 당분이 포도즙 1리터당 160그램에 도달하는 시기에 손으로만 수확해야 한다. 손으로 일일이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샤슬라 재배는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400여 가정이 1250헥타르에서 샤슬라 종을 재배하여 1년에 7000톤가량의 포도를 생산하고 있다. 수확철은 9~10월이지만, 현대의 냉장 기술 덕분에 크리스마스 때까지 먹을 수 있다. 이 샤슬라 포도는 알이 작으면 작을수록 더 달고 향도 강하다.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
관련자료
-
다음
-
이전
Paris님의 댓글
- Paris
- 작성일
최고관리자님의 댓글의 댓글
- 최고관리자
- 작성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