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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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13회에 걸쳐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를 연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준 이재형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 오빌라르에서 렉투르까지는 32.5킬로미터로, 길지만 평지라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오빌라르를 떠나 생탕투안을 지나서 4킬로미터쯤 더 가면 길옆에 ‘빌뇌브의 농장’이라는 숙소가 있다. 이곳을 운영하는 노부부는 이미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마음의 울림을 느껴 숙소를 열었다고 한다. 바깥주인은 젊었을 때 오랫동안 한국과 비즈니스를 한 분이다. 그는 내가 휴대폰 충전기를 잃어버려서 애를 먹고 있다는 얘기를 하자 그것을 선물로 주었다. 순례란 곧 나눔이다.
○ 다시 렉투르에서 콩동까지는 35킬로미터이다. 오랫동안 걸어야 하지만, 중간에 마르 솔랑이나 라 로미유처럼 아름다운 마을이 있으니 휴식을 취하며 쉬엄쉬엄 걸으라.
■ 안개 속을 걷는 사람들
안개 자욱한 이른 새벽, 길을 걷는 사람들. 이 사진을 찍으며 나는 오래전에 본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작품 〈안개 속의 풍경〉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개가 화면을 가득 메우며 황량하고 쓸쓸한 그리스의 풍경을 보여주던 영화였다.
사진은 프랑스의 시골길이다. 영화에서는 누나와 동생이 독일에 사는 아버지를 찾아 정처없이 걸었지만, 저 두 사람은 누구를 찾아, 무엇을 찾아 걷는 것일까. 아마도 자신의 깊고 깊은 곳으로 걸어 내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해마다 5월 둘째 주 주말에 콩동에서는 ‘콩동 반다 페스티벌’이 벌어진다. 혹시라도 이 기간에 콩동을 지나가거나 콩동에서 숙박하는 순례자는 솜으로 귀를 틀어막아야 할 것이다. 2000명이 넘는 음악가들과 35팀의 밴드가 나와서 사흘 동안 밤낮으로 금관악기를 불고 타악기를 두드려댈 것이기 때문이다.
■ 콩동(Condom)은 콘돔과 철자가 같다. 내가 처음 르퓌길 순례를 했을 때 위키피디아에는 콩동에 콘돔 공장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콩동 숙소 주인에게 물었고, 그는 코웃음을 쳤다.
□ 폐교한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카스테아루이의 숙소에서 만난 젊은 프랑스 여성은 프랑스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새로운 무셰트 이야기Nouvelle Histoire de Mouchette》 를 읽고 있었다.
피카르디 지방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열네 살 소녀 무셰트는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고, 그녀의 부모는 알코올과 가난, 병에 시달리고 있다. 아버지는 주정뱅이 밀수꾼이고, 어머니는 큰병에 걸렸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온몸이 비에 젖어 숲속을 헤매던 그녀는 밀렵꾼 아르센을 만난다. 아르센은 그녀에게 비를 피했다 가라고 제안한다. 그는 마을 사람들 중 처음으로 그녀에게 약간의 동정심을 표한다. 하지만 술에 취해 있는 상태였던 그는 무셰트에게 불현듯 격렬한 욕정을 느껴 그녀를 범하고 만다. 집으로 돌아온 무셰트는 지난밤 있었던 일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을 시간도 없이 그녀의 죽음을 목도한다.
아침에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의 경멸과 적의에 부딪힌 무셰트는 “죽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한 노파의 집으로 잠시 몸을 피한다. 노파는 꼭 수의처럼 생긴 흰색 드레스를 그녀에게 준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몬테베르디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수의를 연상시키는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호수 속으로 굴러 들어간다.
나는 이 작품을 종교적 희생과 승화의 이야기로 읽었다. 부모와 마을 사람들의 몰이해와 증오, 멸시에 고통스러워하고 박해받는 이 어린 소녀 무셰트는 성모 마리아나 초기 기독교의 여성 순교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도 무셰트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해 받지 못하고 모욕당해야만 하지 않았던가. 지금 저 젊은 여성 순례자도 타인으로 인해 고통받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림 두 점을 떠올렸다. 하나는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프랑스 회화전시관에 걸려 있는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1797~1856)의 〈젊은 순교자La jeune martyre chrétienne〉이고, 또 하나는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1829~1896)의 〈오필리어〉다. 종교를 버리지 않아서 손이 묶인 채 로마 병사들에 의해 강에 내던져진 젊은 기독교도 여성도, 사랑하는 햄릿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자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오필리어도, 오히려 죽음을 통해 그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던가. “그 애는 꽃으로 만든 관을 늘어진 나뭇가지에 걸려고 기어오르다, 심술궂은 가지가 부러져 화환과 함께 흐느끼는 시냇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구나. 옷이 활짝 펴져서 인어처럼 물에 떠있는 동안 그 애는 자신의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면 본래 물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존재처럼, 옛 노래 몇 절을 불렀다는구나.”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이 이 작품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무셰트〉에서 무셰트가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지자 풍덩 소리와 함께 몬테베르디의 〈마리아의 찬가〉가 흐른다. 이 순간, 고통은 기적처럼 환희로 바뀐다. 순례도 이렇게 고통을 환희로 바꾸는 행위다.
□ 고양이 마을, 로미유
르퓌를 떠나 대략 3주일 뒤면 도착하는 라 로미유La Romieu(순례자라는 뜻이다)는 고양이의 마을이다.
아주 작은 이 마을의 광장 주변 여기저기에 고양이가 돌로 조각되어 있다. 1990년대에 모리스 스로라는 조각가가 창조한 이 돌고양이들은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의 산물이다.
고아 소녀 앙젤린은 아주 심한 기근이 들어 주민들이 고양이까지 잡아먹어야 할 형편이 된 와중에도 암수고양이 한 쌍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기근이 물러가고 다시 마을이 번창하자 이번에는 쥐들이 들끓어 수확물을 먹어치웠다. 그러자 앙젤린은 숨겨주었던 이 암수 고양이를 풀어 쥐들을 잡아먹게 함으로써 마을이 다시 기근을 맞이하는 걸 구해준다.
-일요일이었다. 20명 정도 되는 프랑스인들이 카스텔노쉬르로 비뇽에서 콩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모여 있었다. 다들 얼큰히 취해 보였다. 콩동에 사는 가족들인데, 그중 한 사람의 생일을 맞아 파티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들은 과객인 나를 스스럼없이 파티에 초대했다. 여행자인 나는 길을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기꺼이 손님이 되어 그들이 권하는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나는 금세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여행은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어준다.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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