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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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본지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금의 오르세 미술관 자리에는 원래 나폴레옹 1세 시대에 지어진 3층짜리 오르세 궁이 있었고, 이 궁에는 감사원과 국무위원회 등 공공기관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 궁은 1871년 일어난 파리코뮌 당시 코뮌군에 의해 불타 없어진다.
거의 30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이 장소에 기차역이 들어선 것은 1900년의 일이다. 건축가 빅토르 랄루는 쇠와 유리를 사용하여 거대한 구조물을 짓고 이 구조물을 돌로 둘러쌌다. 하지만 이 기차역은 너무 좁아서 먼 곳으로 가는 큰 기차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오르세 역은 결국 폐쇄되었고, 1983년까지 그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오르세 미술관
1977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지스카르-데스탱이 이곳을 미술관으로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1983년 후임 미테랑 대통령이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 1986년 말 드디어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오르세 미술관이 문을 열게 되었다.
전시 면적이 16,000m2 에 달하는 오르세 미술관에는 연간 3백만 명 가량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1.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이삭 줍는 여인들>(1857, 83.5 x 110cm, 1층, 4번 전시실)은 <만종>과 더불어 밀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세 여성이 밭에서 뭔가를 줍고 있다. 맨 왼쪽의 푸른색 보자기를 둘러쓴 여성은 땅에 떨어진 밀알을 줍는 듯하고, 빨간 보자기를 쓴 가운데 여성은 밀 줄기 하나를 집어들었다. 허리를 굽히고 일하는 이 두 여성과는 달리 맨 오른쪽 세 번째 여성은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이삭을 몇 개씩 묶어 다발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사회의 최하층 계급에 속하는 이 가난한 여성들은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여 수확을 마친 남의 땅에서 얼마 안 되는 이삭을 줍고 있다. 남의 땅에서 수확이 끝난 뒤에 짚이라든가 이삭, 열매, 감자 등을 줍는 것은 중세 이래로 일종의 관습처럼 허용되었다. 따라서 이삭줍기는 불법이 아니었고, 농작물 절도와는 구분되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말을 탄 지주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일꾼들이 쌓아올린 어마어마한 노적가리가 이들이 아픈 허리를 어루만져가며 힘들게 줍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이삭과 서글픈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몇 개 안되는 이삭이라도 얼른 줍지 않으면 그나마 그림 오른쪽 위편에 점점이 찍혀 있는 새들에게 다 빼앗기고 말 것이다.
쥘 브르통(1827-1906)이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1859, 오르세 미술관)을 보라. 이삭을 줍던 여인들이 해질 무렵이 되자 일을 끝내고 뿌듯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밭을 떠나고 있다.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으제니 왕후는 이 시적이며 목가적인 작품을 보자마자 바로 사들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현실이 아니고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
쥘 브르통의 <이삭 줍는 여인들>
이삭을 주워서는 도저히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었던 밀레의 여인들은 농촌의 지긋지긋한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도시로 나가 <빨래하는 여인>(도미에)이나 <빨래 다리는 여자들>(드가), <마루를 대패질하는 사람들>(카이유보트) 같은 도시빈민이 되고 말 것이다.
2.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귀스타브 쿠르베는 프랑스 사실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의 스타일에 결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서른 살 때 고향인 오르낭으로 돌아가면서부터다. 여기서 그는 낭만주의적 화풍을 버리고 사실주의적 화풍을 추구하게 된다.
오르낭의 유지들과 그의 가족들이 등장하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1851년 살롱전에 출품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또 다른 작품 <돌 깨는 사람>(1849, 1945년 폭격으로 인해 독일에서 파괴되었다)은 프루동에 의해 최초의 사회주의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1853년에 프랑스 회화의 견고한 아카데미즘을 깨부수기 위해 <목욕하는 여인들> (1853)을 발표하는데, 벌거벗은 채 베일을 쓰고 있는 여성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에는 이상화되지 않은 평범하고 뚱뚱한 여성이 등장하는데다가 이 여성의 발이 몹시 더러웠던 것이다. 이 당시 사람들에게 육체의 불결함은 곧 정신의 불결함을 의미했다.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던 그는 정치에도 적극 참여하여 파리코뮌 당시 예술분과위원장을 지내기도 했고, 나폴레옹의 제국전쟁을 상징하는 방돔 광장의 기둥을 무너뜨려 감옥에 갇혔으며, 재판을 받아 본인 돈으로 이 기둥을 다시 세워놓으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리하여 재산과 그림을 다 압류당한 그는 스위스로 망명했고,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
<오르낭의 장례식>(1850).1850년은 프랑스 역사로 보나, 근대예술의 역사로 보나 매우 중요한 해다. 루이-필리프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장차 나폴레옹 3세가 될 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쿠르베는 소위 제도권 예술과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진다.
쿠르베의 고향인 오르낭은 브장송 근처의 주민 4천 명에 불과한 마을이다. 인물들 뒤쪽으로 펼쳐진 석회암 절벽은 이 지역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혁명 이후로 사망자가 많아지면서 마을 한가운데의 성당 안에 있던 묘지가 좁아지자 오르낭 주민들은 마을 외곽에 새로운 묘지를 만들었다. 이 작품 은바로 이 묘지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을 그린 것이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례식>
그림은 세 부분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맨 왼쪽에는 장례식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고, 가운데 부분에는 남자들, 맨 오른쪽에는 여자들이 모여 있다. 모두 스물일곱 명인데, 쿠르베는 이들 모두를 자신의 아틀리에로 불러 포즈를 취하게 했다. 성무일과서를 읽고 있는 사람은 신부다. 묘혈 반대편의 혁명가(초록색 옷 입은 사람)와 마주 서 있다. 묘혈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은 묘혈 파는 일을 하는 앙트안 조제프 카사르다. 그의 시선은 저승의 일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로, 무릎은 이승의 사람들에게로 향해 있다. 맨 왼쪽의 흰 장갑 낀 사람들은 관을 들고온 사람인데, 얼굴을 관에서 돌리고 있다. 이 당시 시골에서는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 며칠 동안 시신을 그냥 놓아두는 관습이 있었고, 그로 인해 시신이 부패해 악취를 풍겨서일 것이다.
이들의 오른쪽, 뒷줄에 서있는 사람들은 성당관리인이다. 신부 오른쪽의 붉은 옷 입은 사람들은 성당지기이며, 그 오른쪽의 네 명은 읍장과 공증인, 변호사 등 마을 유지고, 그 뒤의 두 명은 쿠르베의 어릴 적 친구다. 그 오른쪽 초록색 옷 입은 사람과 그 왼편은 혁명가들로, 1792에서 1793년 사이에 혁명옹호자들이 입던 의상을 입고 있다. 혁명가들 오른쪽의 여성은 쿠르베의 어머니이며, 그 오른쪽 세 명은 누이들이고 어린아이는 사촌동생이다.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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