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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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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아름다운 야외 예술품들,  세 번째


본지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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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미셀 오토니엘 (Jean-Michel Othoniel, 1964- ) 

<밤에 나다니는 사람들의 정자>, 콜레트 광장(루브르미술관 지하철역 입구).

 

파리 시내 한가운데, 팔레르와얄궁과 코메디 프랑세즈건물이 마주 보이는 팔 레 르 와 얄 - 뮈 제 뒤 루 브르 지하철역에는 밤에 나다니는 사람들의 정자라는 이름의 독창적인 작품이 설치되어있다. 처음에는 "무례한 여자"라고 이름 붙여졌던 이 작품은 프랑스 조형예술가인 장-미셀 오토니엘에 의해 만들어져 이 지하철역 입구에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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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지하철공사가 파리지하철 개통 백 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공모전에 당선된 이 작가에게 주문한 이작품은 알루미늄을 녹여서 만든 공과 무라노산 유리를 진주목걸이처럼 결합한 다음 알루미늄 구조물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여섯 개의 얇은 기둥 위에는 회전목마나 20세기 초의 파리 가두판매대를 연상시키는 둥근 지붕이 얹어져 있다. 그리고 유리로 만든 두 명의 작은 인물이 이 두 개의 지붕 위에서서 지하철역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두 지붕은 서로 대조되는 색을 띠고 있어서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하나는 낮의 따뜻한 색조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밤의 차가운 색조다. 태양이 이 낮의 아치와 밤의 아치를 환히 비추면 콜레트광장은 꼭 보석상자를 활짝 연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며 꿈의 세계로 바뀐다.

 

 11. 아르누보 작품들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의 아르누보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 유럽에서 곡선과 곤충, , 여성에게 바쳐진 예술운동이다. 아르 누보는 크게 두 가지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하나는 자연이고 또 하나는 여성적 형태다.

 아르 누보가 출현하기 전에는 직선을 사용했던 반면 아르누보는 곡선을 사용하여 식물이나 동물적인 모티브를 표현한다. 아르 누보는 또한 컬러의 사용과 재료의 혼합에 의해 구분된다. 그래서 아르 누보 건축물의 정면에서는 돌이나 세라믹과 혼합한 주철을 보게 될 것이다.

 아르 누보 건축물의 또 다른 특징은 정면의 실용적 부분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곡선이 많이 사용된다는 이유로 “파스타 스타일”이라고 불렸던 아르누보는 매우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 예술의 개념에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 그 뒤로 주류 예술(회화, 조각)과 비주류 예술(가구, 포스터)은 동등해졌다.

 프랑스의 아르누보는 에밀 갈레를 중심으로 결성된 낭시화파와 엑토르 기마르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 예술가들은 새로운 형태와 모티브를 도입함으로써 파리의 건축물을 크게 변화시켰다. 사마리텐 백화점이나 갈르리 라파에트 같은 백화점은 그 당시만 해도 매우 이색적이었던 이 스타일의 완벽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아르 누보건축을 대표하는 인물은 엑토르 기마르(1867-1942). 본인은 자신의 작품을 “기마르 스타일”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지만, 그의 이름은 아르 누보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로 남아 있다. 그가 설계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은 대부분 16구의 모차르트 거리와 라퐁텐 거리에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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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의 대표적인 작품인 기마르의 카스텔 베랑제 

 이 건축물들 중 대표적인 것은 라퐁텐 거리 14번지에 있는 카스텔 베랑제(Castel Beranger). 엉뚱하고 기괴한 것을 좋아하는 땅주인 푸르니에 부인이 아직 무명이던 기마르에게 의뢰하여 지은 이 임대용 아파트는 1898년 르피가로 신문이 공모한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정면" 최고상을 받았다. 기마르는 이 건물에 "평면성과 규칙성의 거부"라는 원칙을 응용하였고, 이 건물의 외면뿐만 아니라 실내장식과 가구까지 모두 직접 설계하였다. 모차르트 거리 122번지에는 그가 설계하고 살았던 “기마르의 집(Hotel de Guimard)”이 있으며, 마레 지구에는 그가 설계한 유대인 예배당(10, rue Pavée, Paris)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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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르가 설계한 파리 지하철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파리지앵들이 매일같이 이용하는 장소, 즉 지하철에 있다. 1899, 파리지하철공사는 1900년에 1호선이 역사상 처음으로 파리에서 개통될 이 새로운 교통수단의 입구를 설계해줄 건축가를 공모했다. 귀마르는 주철을 사용하고 표준화된 생산과정을 채택함으로써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이 과정을 채택하여 지하철역 입구 모델을 모든 지하철역(서로 다른 형태를 가진)에 빠르고 쉽게 적용함으로써 지하철공사는 엄청난 액수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마르가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잠자리 모양으로 설계한 포르트 도핀(Porte Dauphine) 지하철역과 레자베스(lesAbbesses) 지하철역, 샤틀레(Chatelet) 지하철역 입구는 아직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아르누보 양식의 가구와 세라믹제품 등을 볼 수 있다.

 

 12. 피카소, <도라 마르 흉상>, 로랑-프라슈 공원.

 되마고 카페 근처의 작은 로랑-프라슈 공원에는 피카소가 시인 아폴리네르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 조각한 연인이 있다. 그리고 1937 511, 피카소는 거기서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그랑조귀스탱 거리 7번지에서<게르니카>를 그리기 시작하여 같은 해 6월 초에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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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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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도라 마르 흉상>
 

  5 1, 첫 번째 스케치들이 그려졌다. 그 이후에 그랑토귀스탱 거리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에서 40점의 스케치가 더 그려졌고, 프랑스 사람이지만 크로아티아 사람의 피가 좀 섞여있기도 하고 아르헨티나 사람의 피가 좀 섞여 있기도 한 초현실주의 예술가이자 파시즘 반대자인 그의 연인 앙리에트 도라 마르코비치(일명 도라 마르)가 이것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화가는 처음에는 외부에서 벌어졌던 그 장면을 실내 장면으로 만들어놓았다. 마치 학살이 아틀리에에서, 그러니까 관객이 그 장면을 보게 될 바로 그 방에서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게르니카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가 리폴린으로 벽에 아주 평범한 그림을 그리자 그림은 물질적인 노동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또 이 스케치들은 흑백으로도 그려졌다. 피카소가 신문에서 본 사진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더 사실적이고 더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도시에서는 폭격으로 인해 연기가 자욱해져 대낮인데도 어두워지면서 색깔이 일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관람객의 눈에 공포가 지속적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모티브로 충분했다. 불길, 울고 있거나 공포에 사로잡힌 여인들, 목숨을 잃은 아이들, 사지가 절단되어 길게 눕혀진 채 짓밟히는 고대 전사, 그리고 폭발하는 전구 아래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스페인의 두 토템 동물 황소와 말. 피카소는 아마도 봄바[bomba, 폭탄] 와 봄비야엘 렉 트 리 카 [ b o m b i l l aeléctrica,전구]라는 단어로 말장난을 했을 것이다즉시 현상된 도라의 사진들 덕분에 피카소는 그려지고 있는 작품과 완성된 작품을 대조할 수 있었다

스페인 전시관은 1937 7 12일에 문을 열었다. 게르니카는 중정(中庭)에 전시되었고, 정치적 문제를 좀 더 명확하게 구체화시켰다. “아닙니다. 그림은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그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림은 적에 대한 공격용 전쟁 수단인 동시에 방어용 전쟁 수단이지요.” 나중에 피카소는 현실참여적이며 격정적인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언론은 그의 이 말을 확대해석했다

게르니카는 그 목적을 달성했다. 화가와 파리 주재 나치독일 대사였던 오토 아베츠사이의 유명한 설전(“이걸 그린 사람이 당신인가요? / “아니오, 제가 아니고 당신이 이 그림을 그린 겁니다!)은 실제로 벌어졌을까? 그리고 피카소는 오토 아베츠와 말싸움을 한걸까, 아니면 그 당시 독일군장교였던 에른스트 윙거와 말싸움을 한 걸까?" (아델  압데세메드, 크리스토프 오노--비오, <스페인의 밤>, 2021, 뮤진트리.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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