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조선족 협회, 강성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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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를 통해 조선족 간의 연대와 결속을 다져나가고 있어
파리광장과 인터뷰 중인 강성호 프랑스 조선족 협회 회장
프랑스에 조선족 협회가 있는지 알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협회를 만들어 프랑스내에서 서로 연대하고 결속을 다져 나가는 조선족 협회의 강성호 회장을 만나 프랑스의 조선족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협회 소개부터 해주세요
-조선족 협회는 원래는 2000년에 만들어져서는 정식으로 등록이 된 것은 2004년이에요. 초대회장으로 제가 2년 정도했고, 다른 분이 하다가 또 제가 하게 되었어요. 사실 조선족 협회가 있어야 되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과 상의를 했어요. 여러 의견들이 있었어요. 조용히 있는 사람들,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하고픈 분들, 그런데 한인회도 있고 여러 협회들이 있는데, 우리도 있었으면 좋겠다 등등이었어요. 그러면 다시 새로하자 해서 올해 선관위부터 조직을 해서 회장 선거를 했죠. 올해 5월 1일에 봄철 운동회를 다시 시작했어요. 그리고 프랑스 한인회 체육대회는 무조건 참가하고 있어요. 한인회 체육대회는 조선족들 모아가지고 매년 축구로 참가하고 있죠. 그런 기회 아니면 언제 만나겠어요 ? 조선족 협회에서 봄철 운동회하고 올해는 10월 1일에 추석행사를 해요
협회 설립 목적이나 취지라면요 ?
-협회가 없는 것 보다는 있는게 좋쟎아요. 이렇게 해외에 나와 있는데, 끼리끼리 있는 것도 좋지만 모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쟎아요. 또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사업을 하면 서로 정보 공유도 하고요. 모인 사람들끼리 일종의 한국의 계 같은 것을 해서 누가 힘들다거나, 사업을 새로 한다고 하면 돈을 빌려줘요. 아주 저렴한 금리로 빌려주죠. 그게 제목이, ‘프랑스에 사는 조선족들 기업이나 회사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금’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게 한때 줄어들었다가 다시 늘어나서 협회 총무가 자금을 관리하고 있어요. 그거 한지가 10년이 되었어요. 담보까지 세워서 안전하게 하고 있어요.
우리는 누가 식당을 오픈했거나, 생일 잔치를 하면 기본 100유로씩은 다 가져가요. 여러 명을 초대했는데 그 비용을 혼자 어떻게 감당을 해요 ? 그렇게 서로서로 돌아가면서 해요. 누가 생일 잔치를 하는데 꽃을 들고 오는데, 꽃이 뭐 그리 필요해요 ?
돈 보다는 서로 이렇게 도우면서 소통하는거에요. 두달에 한번씩이라도 만나서 자금 건의도 하고 활동하는거죠.
협회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발적인데, 협회 자금 제도 등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원칙 또한 세워놓고 있어요.
파리에 조선족들이 몇 명 정도 계시는지요 ?
-한 500명 정도 되는데, 협회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은 한정적이에요.
외국 생활이 힘드시지는 않으세요 ?
-안 힘들어요. 해외에 나오면 그건 당연한거에요.
연변에 계시다가 바로 프랑스로 오셨어요 ? 한국은요 ?
-한국은 한번도 안가보았어요. 연변에 있는 분들은 한국과 같은 민족인데 나라가 달라서 조선족이라고 하죠. 연변에서는 한국인이나 북한인이나, 고려인이나 모두 조선족이라고 불러요. 민족을 말하는거쟎아요.
연변에 계시는 분들은 일제를 피해서 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연변에 계시는 분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을듯합니다. 그쪽에서 태어난 조선족들도 있는거쟎아요. 조선족이라는건 언제 형성이 된건가요 ?
-제가 공부한 것에 의하면, 중국 조선족 역사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제일 먼저 어떻게 형성되었냐 하면은 청나라때 중국에서 조선에 가서 군대를 모집해 왔어요. 그때 군대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중국 화북성에 모여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 중국에서 최초로 정착한 조선족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거기보면 1902년에 ‘전라남도 어디에서 몇 십호가 이주했다, 함경북도에서 용정 어디로 또 몇 십호가 이주해가고’ 등 이렇게 조선족 역사가 형성이 된거죠. 독립군은 다른 것이고요.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요 ?
-중국 연변에서는 고려인이라고 안부르고요, 러시아 쪽에서 고려인이라고 불러요
중국 조선족들을 이끌어가는 정신 같은게 있는지요 ?
-조선족이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이쟎아요. 주덕해라는 분이 계속 북경을 오가면서 조선족 자치주를 만든거에요. 아니면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으로 있었겠죠. 자치주라는게 우리문화와 전통을 지키는 의미가 있쟎아요. 그분의 공로가 크죠. 중국은 자기네한테 맞게끔만 역사를 서술해요. 윤동주 시인은 용정에서 태어났어요. 그분은 조선족이에요. 그런데 그냥 한국사람으로 알고 있죠.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제일 강해요. 중국 내 소수민족들 중 대학 진학율이 제일 높은게 조선족들이에요.
지난 5월 조선족 협회의 봄철 맞이 야유회에서
파리에는 언제 오셨어요 ?
-1996년도에 왔어요. 빠르면 1년, 늦어도 3년안에 돌아간다고 했던게 이렇게 살고 있어요.
회장님한테 프랑스는 어떠세요 ?
-나는 잘 모르고 살고 있어요. 불어를 잘 못하니 여기에도 마음이 잘 안가요. 프랑스는 좋은 나라에요. 우리한테 참 잘해줬어요. 우리가 잘 적응 못해서 그렇죠. 이젠 많은 조선족들이 잘 정착해서 살고 있어요.
중국땅에서 한국말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는게 대단한 것 같아요.
-옛날에는 두만강이나 압록강을 조선에서 건너가면 마을이 없었다고 해요. 전부 나무밖에 없었데요.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그 나무들을 다 케어내고 농사를 짓고 자리잡으면서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한거에요. 그래서 거기에는 중국인들이 없어요. 나중에 중국인들이 조선족 동네에 와보면, 조선족들이 쌀농사 즉 밭농사는 잘하는데 채소 농사를 잘 못해요. 조선족 동네에 중국사람들이 오면 채소 농사만 해요. 중국사람들이 조선족 구역에 들어오면 안나갈려고 해요.
회장님 고향은 어디세요?
-두만강 건너편의 화룡이에요.
북한은 가 보셨겠어요.
-어릴 때는 자주 갔었어요. 이모, 고모들이 북한에 살았어요. 그때는 자유 왕래가 가능했을 때였어요. 중국의 문화혁명 이후에는 통행증이 있어야만 갈수 있었죠.
북한은 정말 가난해요 ?
-가난해요. 70년대에는 우리보다 나았어요. 당시 겨울에 타는 스케이트가 참 좋았어요, 편리화라고 신발도 아주 잘 만들었어요. 개방을 안하니깐 힘들죠.
조선족 입장에서 보실 때 남한과 북한을 어떻게 보세요 ?
-남한은 잘 살쟎아요. 북한에 좀 배려를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같이 상대해서 싸우지 말고, 골칫거리인 북한을 좀 포용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일단 협회를 구성하실려면 사람들이 모여야되쟎아요. 어떻게 모이실 수 있었어요 ?
-한국은 카카오톡으로 하는데, 우리는 위챗(WeChat)이라는 앱으로 1백 20여명이 있는 단톡방으로 서로 연결하고 있고요, 조선족들도 협회를 구성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릴려고 해요.
조선족 협회에서 봄, 가을로 행사를 하시는데요, 다른 한인 단체장들은 초대 안하시는지요 ?
-그게 하다가 끊어지고 해서 아직 초대 못하고 있어요. 올 가을 행사까지 하는거 봐가면서 초대할 예정이에요. 어쨌든 꾸준히 해 볼 생각입니다. 행사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많이 오면 좋쟎아요. 그래서 좀 힘들었는데, 그 마음을 내려놓고, 얼마가 오든, 3명이 오든 무조건 하자 싶으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봄철 야유회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
-처음에는 어린이들 행사부터 시작해요. 그리고 탁구, 축구도 하고, 바베큐도 해요. 30 유로 참가비 내고, 바베큐는 협회에서 다 준비해요.
강성호 회장은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든 그렇지 않든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협회를 이끌어나가고자 한다고 밝히면서, 많이 참여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욕심이라고 했다.
10월 1일 일요일에는 벵센느 숲에서 프랑스 동포 추석맞이 체육대회를 가졌다.
<파리광장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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