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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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몽마르트르의 역사
3세기경, 파리 최초의 주교 생드니는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서 로마인들에게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언덕은 몽 마르티움, 즉 순교자의 산이 되었다.
옛 몽마르트르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몽마르트르 언덕은 과수원과 포도밭(이 포도밭의 일부가 북쪽 언덕에 아직 남아 있다), 초가집, 40여 개의 풍차방앗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당시 몽마르트르는 아직 파리가 아니었고(파리로 편입된 것은 1860년의 일이다), 638명에 불과한 주민은 주로 방앗간 주인이나 몽마르트르 지하에 매장되어 있던 석고 광산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파리 시내에서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집세와 물가가 싼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1870년의 보불전쟁과 그 다음 해에 일어난 파리코뮌이 끝나자 프랑스는 평화를 되찾고,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질 때까지 이곳에는 500명이 넘는 화가와 시인들, 작가들, 음악가들이 살며 인상파와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의 예술 혁명을 일으킨다. 그럼 왜 이곳에 그렇게 많은 예술가들이 몰려들었을까?
이곳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예술가들은 인상파 화가들이다. 그들의 미학적 원칙이 자연을 그리는 것이었고, 그 당시 몽마르트르가 자연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알면 이 같은 사실이 이해된다. 파리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초원과 잡목 숲, 풍차방앗간, 라일락꽃이 핀 정원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작품 소재가 어디 있겠는가? 마네와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을 중심으로 한 이 화파는 이곳의 물랭 드 라 갈레트나 라 본 프랑케트 같은 술집과 카바레를 드나들며 어린아이처럼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1880년대 무렵에는 카바레와 무도회장이 블랑슈 광장과 피갈 광장 등 몽마르트르 언덕 남쪽에서 번창하며 오락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엘리제 몽마르트르, 검은 고양이, 물랭 루즈가 연이어 문을 열었고, 이런 술집들은 로트렉의 선전 포스터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1900년이 되면서 이번에는 전 유럽에서 화가들이 몰려들었다. 아직은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섬 같은 곳이었고, 집세도 쌌으며, 인상파 화가들이 이미 이곳을 유명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블라밍크 등의 야수파가 자리를 잡았고, 세탁선이라는 아틀리에에 정착한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라는 그림을 그려 입체파 미술로 가는 길을 열었다. 모딜리아니도 이태리에서 와서 이곳에 자리 잡았다. 이들이 드나들던 라팽 아질(날쌘 토끼라는 뜻이다) 같은 술집과 세탁선 같은 아틀리에는 이 당시의 예술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예술가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지하철로 갈 수 있게 된 몽파르나스가 몽마르트르의 뒤를 잇게 될 것이다.
▯ 사크레 쾨르 성당
사크레 쾨르(sacré coeur)는 성스러운 마음이란 뜻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의미한다.
사크레 쾨르 성당
1870년 프랑스와 프러시아(지금의 독일)는 전쟁을 했다. 프랑스는 먼저 선전포고를 했지만, 군부의 극심한 부패로 처참하게 패했다. 그 당시 프랑스를 다스리던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혔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프랑스의 중심도시 파리는 성문을 잠그고 양심적인 정치인, 지식인들과 프롤레타리아들을 중심으로 프러시아군에 저항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외세(프러시아)를 끌어들여 파리 시민들을 진압한다.
사크레 쾨르 성당의 기마상
그리고 이때 베르사유궁 거울의 방에서 프러시아에 굴욕적으로 항복한 정부에 대해 쌓인 파리시민들의 분노는 그 다음 해 5월 파리코뮌이라는 시민저항운동으로 표출된다. 이 파리코뮌이 처음 시작된 곳이 바로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다. 제 2 제정이 멸망하고 들어선 제 2 공화국은 파리시민들이 프러시아군에 저항할 때 그들 돈으로 산 대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사크레 쾨르 성당이 세워지기 전의 몽마르트르 언덕 꼭대기에서 대포를 지키고 있던 정부군 소대는 이 명령을 거부하면서 5월 한 달 동안 정부군과 시민군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5월 마지막 주일("피의 1주일"이라고 부른다), 페르 라세즈 묘지에서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시민군은 결국 패배, 묘지 안에 있는 "시민군의 벽" 앞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파리코뮌 희생자 추모 현판
1873년, 파리 대주교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은 프랑스 국민들의 신앙심이 약해졌기 때문이라 주장하며 파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성당을 세울 것을 요청했고, 1875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성당 건축은 국민성금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1875년에 시작되어 인류의 또 다른 재앙인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이어졌다. 무려 44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축가인 폴 아바디는 석고를 파내어 텅빈거나 마찬가지여서 지반이 약한 부지 위에 성당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43미터의 수직갱도 83개를 박고 그 속에 시멘트를 부어넣어 기초공사를 했다. 어쨌든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고, 에밀 졸라 같은 작가는 “이 희끄무레한 건축물이 파리를 내려다보며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고 말한다. 성당 정면은 로마네스크 양식인데, 둥근 지붕과 종탑은 지나치게 크다. 이 같은 불균형은 아바디가 1884년에 급사하는 바람에 다른 두 명의 건축가가 이어받아 공사를 했기 때문이다.
이 성당은 파리 근교의 채석장에서 캐낸 돌로 지어졌는데, 이 돌은 빗물과 접촉하면 흰색 물질을 분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 이 성당은 특이하게도 방향이 동서가 아닌 남북이며, 순례 성당이라서 장례식이나 결혼식은 안 한다.
성당 정면 왼쪽에는 생 루이(Saint Louis, 1226-1270)의 동상이 서 있다. 생 루이는 루이 9세로, 프랑스 왕 중에서 유일한 성인으로 유럽의 왕들을 설득하여 십자군운동을 갔다가 튀니지에서 순교했다. 오른쪽에 서 있는 동상은 구국의 소녀 잔다르크(1412-1431)다.
사크레 쾨르 성당 왼쪽으로 나 있는 오르막길을 따라 테르트르 광장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작은 나다르 공원이 있고, 거기 동상 하나가 서 있다. 슈발리에 드 라 바르라고 불리는 프랑수아-장 르페브르(1745-1765)의 동상이다.
프랑수아-장 르페브르 동상
1765년 8월, 아베빌이라는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에 서 있는 십자가가 훼손된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무 증거도 없이 다짜고짜 프랑수아-장 르페브르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평소에 그가 불경한 말을 자주 했고, 종교행렬이 지나가는데도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더더구나 그의 집에서는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상징하는 볼테르의 <철학사전>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 다음 해 2월에 손이 잘리고 혀가 뽑혀진 다음 산 채로 화형 당했다. 그러나 1793년에 마을의 십자가를 훼손시킨 것은 나무를 싣고 가던 수레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프랑수아-장 르페브르는 명예를 되찾았다.
이것은 18세기 후반에 프랑스를 휩쓸었던 가톨릭의 광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제 슈발리에 드 라 바르의 동상은 프랑스의 보수적인 가톨릭을 상징하는 사크레 쾨르 성당을 노려보고 있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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